[비즈한국] “이 동네는 뭐가 이래!” 퇴계로 모 회사에 입사하고서 채 몇 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 총체적으로 인생이 망해 가는 느낌을 받았다. 먹을 것이 없었다. 인류가 강가에 정착한 것도, 철새가 바다를 건너는 것도 모두 서식환경 때문인데, 퇴계로 그 회사의 서식환경은 척박했다.
모든 회사에는 먹을 만한 구내식당이 있거나, 아니면 회사 앞 도보 5분 거리 이내에 어지간히 갈 만한 식당들이 ‘착착착’ 포진해 있어야 하지 않나? 회사원의 직업 만족도에는 분명 먹을 것이 풍족한 서식환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몇 달이 지나고, 맛없는 점심 식사에 멸종 위기를 느꼈을 때, 나는 택시를 타고 우래옥이니 을지면옥이니 필동면옥이니 하는 먹보 도래지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허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여유가 있을 때 얘기였다.
월간지 마감이라는 것은 너울과 같다. 쫄쫄 굶어가며 바쁜 일들을 기계처럼 쳐내야 하는 시기가 있고, 배달 음식에 사육을 당하며 생명을 유지해야 할 때가 있다. 두 시간씩 나가서 한남동이나 신사동 같은 동네에서 여유 부리며 식사할 수 있는 때는 매우 짧다. 특히나 수익이 나지 않아 회사가 소수 직원에게 격무를 요구하는 잡지에서는.
물론 이런 불평은 나 같은 먹보들이나 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회사 앞의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울 때마다 맛없어서 내가 멸종할 것 같다는 공포를 느끼는 것도 결국은 나 하나만의 일이었다. 필사적으로 먹을 만한 곳을 탐구한 것은 그래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인류는, 아니 나는 결국 척박한 그곳을 일구었다. 몇 곳이나 엄청난 식당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전에 그 회사를 오래 다니다 바싹 마른 후배가 “거기가 정말 먹을 게 별로 없는데…” 하며 콕 집어준 칼국수집은 도보 10분 거리였다.
‘만나손칼국수’. ‘맛나’도 아니고 ‘만나’는 또 뭐란 말인가. 이름이 이상했지만, 블로그에 글도 없었지만, 하도 절박하니까 가보기로 한 것이었다. 인쇄소 종이 먼지가 날리고 오토바이 기름내가 풍기는 골목에 있는 칼국수가 맛있을 일이 있단 말인가. 찾아가는 길조차 처음에는 갈지자로 헤맸다.
진한 멸치 향이 먼지 냄새와 기름내를 헤치고 코에 닿았다. 점심시간에 딱 맞춰 갔더니 이미 줄까지 늘어서 있었다. 이 동네에서 먹고 살기 힘들었던 이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철새는 어쩌다 보니 무리를 놓쳤고, 울면서 열심히 혼자 날았다. 그리고 다음 저습지에 힘겹게 도착해서 단 물과 통통한 물고기를 만끽하는 동료들을 다시 만났다. 나는 그 철새가 된 것만 같았다.
닳고 닳아 대리석 같은 무늬가 되어버린 낡은 테이블 위에 성글게 무친 배추 겉절이가 턱 놓이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칼국수 한 그릇이 따라온다. 뽀얗게 밀가루가 풀려 부드러운 노란 빛깔을 띠는 국물이 아까 그 진한 멸치 향의 근원이다. 김과 파채가 적당히 얹혀 있다. 칼국수에 만두를 뿅뿅뿅 몇 개 띄워주는 칼만두도 베이스는 같다. 이 식당은 메뉴가 칼국수에 칼만두, 끝이다.
‘한 그릇’이라고 하기보다는 ‘한 대접’ ‘한 대야’라고 불러야 맞을 것 같은 양의 면이 잠겨 있다. 주변에 몸으로 일하는 이들이 많으니 다른 곳에선 1.5인분일 양쯤은 돼야 정량인 모양이다. 책상에 묶여 있다시피 하는 일을 하는 내겐 꽤 버거운 양인데, 그래도 두세 번은 다 먹어본 적도 있다. 맛있어서….
국물 향도 맛도 좋지만, 면발도 좋다. 칼이 지나간 모서리가 예리한 각도를 유지하는 면은 잘 만든 일본 우동이 그런 것처럼 슬쩍 부풀어 있다. 숙성이 잘 되어 부드럽게 씹히지만 동시에 탄탄한, 그래서 입 안에서 춤을 추고 울대를 툭툭 치는 그런 면이다.
우동은 1만 원 한두 장이 아깝지 않게 존경하면서 참 잘도 먹었는데, 그 반값인 칼국수의 공력은 그간 칭송하지 않았다. 아아, 흔해서 발로 차고야 말았던 연탄재가 칼국수였구나. 글을 쓰기 위해 최근 또 들러 면발을 확인하며, 이런 칼국수를 앞으로도 부지런히 찾아가볼 직업적 사명을 정했다(그러니까 면이 좋은 곳은 언제라도 제보를 바랍니다).
알고 보면 이 집은 건어물 전문 시장인 중부시장 남쪽 입구에 닿아 있다. 국물 낼 좋은 재료가 넘쳐나는 환경인 셈이다. 아직 재개발 순차가 닿지 않아 동네에 경천동지가 일어난 적이 없으니 손님도 죄다 단골이다. 점심 장사를 오후까지만 길게 빼서 하고 저녁 장사를 하지 않아도 그간 생계에 별 탈이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면을 잘 만들 여유도 있고, 배추를 손봐 겉절이를 수시로 담글 시간도 있다.
그 회사는 결국 1년을 채우고 못 해먹겠다며 때려치웠다. 서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해의 사계절, 만나손칼국수를 비롯한 몇 곳의 숨겨진 식당들 덕분에 바싹 마르지 않고 퇴사했다. 보답(?)으로 ‘수요미식회’ 국수 편에 추천해 봤더니(나름 식당 자문위원) 냉큼(?) 선정되어버려 일부러 시간 내서 가보려 해도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제는 좀 잠잠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보시’를 요구하는 불청객들은 아직도 끊이지 않아 괴로운 모양이었다.
올해는 5월 1일부터 콩국수를 개시한다고 한다. 칼국수 못지않은 완성도라 벌써부터 입맛을 다시고 있다. 시청 앞 진주회관에 고정됐던 발길을 끊게 한 정도인데, 그 얘기는 여름이 깊어지면 그때 또….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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