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작가들은 빈 캔버스로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렌다고도 한다.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작품 제작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국미술응원 프로젝트’ 시즌4를 시작하는 마음도 같다. 초심으로 새롭게 정진하려고 한다. 미술 응원의 진정한 바탕을 다진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고 외롭게 작업하는 작가를 찾아내 조명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미술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경향을 더욱 객관적 시각으로 조망해 한국미술의 미래를 보여주려는 노력도 병행할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을 이끈 것은 형식 개발에 의한 양식의 변천이었다. 즉 바로크-로코코-고전주의-낭만주의-신고전주의-사실주의-인상주의로 편도 일차선 같은 흐름이 19세기까지 이어졌고, 20세기로 들어서면서 형식의 난개발이 불러온 백화점식 미술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지난 100년간 미술에서는 수많은 주의(-ism)가 나타났지만, 대부분이 단명했다. 지난 세기에 나타난 미술 흐름 중 21세기에도 살아남은 것은 추상미술과 개념미술, 그리고 팝아트다.
추상미술은 디자인과 결합해 현대적 장식성을 획득해 번성했다. 아이디어 자체를 예술의 본질로 삼은 개념미술은 건축, 조각, 무용, 영화, 회화, 사진 등 다른 장르를 복합적으로 수용해 새로운 형식의 미술로 여전히 금세기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팝아트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성장했고 지금은 슈퍼맨이 되어 세계의 하늘을 날아다닌다. 어떻게 이렇게 막강한 힘으로 세상을 주무르게 됐을까. 미국의 정체성을 가장 잘 담아낸 미술이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 세계를 지배한 미국의 힘은 경제력과 더불어 문화력에서 나왔다. 이 시기는 대중이 중심에 선 시대였고, 그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은 대중문화였다. 대중문화의 생리를 그대로 따라간 것이 바로 팝아트다. 특히 매스미디어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은 대중문화 덕분에 오늘날 가장 강력한 미술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대중의 정서를 담아내는 팝아트는 신세대 작가의 감각과 잘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이 선호하는 표현 방식으로 인기가 높다.
지히도 팝아트 표현 방식으로 주목받는 작가다. 그는 팝아트의 여러 가지 표현 언어 중 기호와 캐릭터를 택했다. 그런데 그게 지극히 보편적이며 일상적이라는 데 매력이 있다. 숫자, 글씨와 낙서 같은 선, 그리고 작가가 창안해낸 입술과 눈을 도상화한 캐릭터가 바로 그것이다.
굵고 검은 선으로 간략하게 만든 눈과 입술은 독창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친근감을 준다. 이들은 마치 디자인처럼 명확한 색채로 그려져 화면을 가득 메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로가 일정한 질서 속에서 연결돼 있다.
이런 구성으로 그는 인간관계를 말한다. 신세대들이 엮어내는 일상의 시대 언어인 셈이다. 그건 연애 이야기, 우정,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계 등에서 나타나는 감정의 문제들이다. 심각한 색채나 형태가 아닌 지극히 흔하게 보이는 감각적 도상으로 가볍지 않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처럼 신세대의 보통 이야기가 스며 있는 캐릭터 덕분에 지히의 그림은 팝아트가 빠지기 쉬운 감각적 가벼움, 치기 어린 아이디어 같은 것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팝아트는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전준엽 화가·비즈한국 아트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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