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보광동 종점’. 몇 해 전에야 이 동네에 발을 들인 나로서는 무엇의 종점인지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허나 모두가 보광동 종점이라고 하니까 그저 종점이었겠거니 하고 가는 동네다. 보광동 주민센터 사거리.
동네 이름 끝에 종점이라는 명사가 굳이 붙은 동네는 경험적으로 맛난 식당이 많을 확률이 높다. 종점 동네는 지가가 어지간히 싸니까 버스든 지하철이든 택시든 차고지를 뒀을 것이고, 식당이 이런 지역에 자리 잡으면 임대료 부담이 덜해 사장님도 음식에 굳이 장난칠 이유가 생기지 않는다.
거기에, 그 차고지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건 재개발로 인해 식당이 사라질 일이 생기지 않았었다는 의미도 된다. 또, 종점이라는 교통적 위치는 사람이 새로 들지 않고, 있는 사람도 왠지 잘나가지 않는 곳이니 단골 장사만 잘하면 된다. 10년 이상 된 단골이 많은 식당은, 단골들이 그 식당의 업태를 숟가락 개수까지 세어가며 깐깐하게 관리감독(?)하며 맛을 지켜왔으리란 믿음도 갖고 있다.
‘종점숯불갈비’는 십 몇 년 동안(사장님이 워낙에 무심하고 ‘시크’하셔서 개업년도를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신다) 보광동 종점 한 골목에 자리 잡고 예전부터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 음식을 내는 곳이다. 손님도 거의 동네 사람들뿐이었다. 외지에선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그런 동네 식당.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 세월을 쌓기만 하면 별 탈이 없다. 전국구 유명 식당이 되진 않아도 동네에서 먹여 살려준다. 운이 좋다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식당이 되기도 쉽다.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 잘해왔던 대로도 충분하니까. 이 식당은 전 세계, 까지는 아니어도 범 아시아적인 명성 정도는 얻어도 되는 곳이다.
일부러 자꾸 반복하고 있는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이 너무 투박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은 막상 하는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인 대신에, 힘이 정말이지 세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어 가는 것이 이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이다. 종점숯불갈비가 그 쉽지 않은 걸 한다. 그러니까 범 아시아적인 인정은 받아도 된다.
처음 갔을 땐 돼지갈비였다. 새카만 돼지갈비가 두툼한 혼수 이불처럼 불판을 덮었다. 갈빗대에 붙어있는, 틀림없는 돼지갈비였다. 캐러멜 색소로 맛을 내고 식용접착제로 다른 부위를 이어 만든 세간의 거짓말쟁이 돼지갈비가 아니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던 시대로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 돼지갈비다.
갈빗대에 붙은 살점은 입 안에서 부드럽게 허물어지고, 뼈대에 붙은 근막마저 적당히 풀어져 남김없이 발라 먹는다. 과하게 달지 않고, 과하게 짜지 않아 질리지 않는다. 입 짧은 나도 이 돼지갈비를 2인분은 먹어 치울 수 있다. 아니 사실은 3인분까지도. 유달리 새카만 색을 냈지만 캐러멜 색소를 쓴 것이 아니다. 이 색의 비밀은 너무 궁금해서 조르고 졸라 알아낸 거라 공개적으로는 쓰지 못하겠다.
어느 날 돼지갈비 안주만으로 술이 꽉 차지 않았을 때, 매운 갈비찜에도 손을 댔다. 주문하면서 걱정이 많았다. 대학가에 잠시 유행하던 매운 갈비찜과 이름이 같아서다. 발을 들인 지 얼마 안됐던 때라 들큰한 ‘유사 치즈’와 짝을 이뤄 인공적인 매운맛을 듬뿍 낸 그 음식이 나오나 걱정했다. 이제는 이 식당을 제법 이해할 수 있게 됐고, 그때 걱정하던 나의 뒤통수를 좀 때려주고 싶다. 다른 곳도 아닌 ‘종점’에서 쓸 데 없는 걱정도 팔자라고.
넉넉한 국물에 잠겨 나오는 것이 찜보다는 찌개에 가깝다. 당면이 넉넉하게 들어가고 당근과 양파, 대파도 당연히 들어가고, 깻잎이 마무리를 담당해 달고 매운 맛에 향긋한 포인트를 준다. 먹으면 맵다. 당연히 맵다. 하지만 아프지 않다. 자연스럽게 매워서 맛의 균형도 맞아떨어진다.
캡사이신 같은 ‘쉬운 선택’을 하면 흔히 벌어지는 일이 극단적인 맛으로 균형이 기울어 결국 무너지는 일이다. 그냥 맵기만 하고, 혀와 위장을 괴롭히는 음식이 되고 만다. 고추가루, 청양 고추가루, 청양고추, 그리고 후추의 배합을 적당히 바꿔가며 매운 맛을 조절하는 이 식당의 매운 맛은 항상 균형을 참 잘 잡고 있다.
무려 용인시에 사는 알중이 친구는 강남의 다른 식당을 좀 가보자는 데도 자꾸 ‘종점’에 또 가자고 한다. 그 ‘매갈찜’ 타령을 나는 거절한 적이 없다. 방금 먹고 와서 글을 쓰는데도 다시 가서 먹고 싶다.
돼지갈비든 삼겹살이든 고기를 주문하면 칼칼한 된장찌개가 딸려 나오지만 적당히 냄새 나는 청국장을 주문해 곁들이면 더 꿀맛이다. 늦은 오후에 휙 들어가 수더분한 양념에 휙 볶아 내는 오징어볶음 백반을 먹고 나오기도 한다.
상 위엔 적당히 그때그때 만만한 재료로 만든 반찬 대여섯 가지가 깔린다. 좋기야 다 좋지만, 사실은 이 집 반찬 맛이 당겨서 그냥 밥만 먹으러 갈 때도 많다. 별 것도 없는데 그냥 맛있다. 유난 떨지 않은 맛이다. 그냥 하던 대로 꾸역꾸역. 유난은 이런 순진한 맛을 이 각박한 세상에서 흔치 않게 보고 감격하는 나 같은 사람이나 떠는 것이다.
종점숯불갈비에 대해 가장 유난 떨 만한 부분은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바로 김치다. 정확히는 묵은지. 더 정확히는 남도식 묵은지. 가을에 담근 김치를 저온에서 2년간 묵히는데 노골적으로 고약한 냄새를 내는 젓갈이 활약한다. 그 진한 단백질은 기가 막힌 감칠맛으로 변신하고, 대놓고 짭짤하게 잘 절인 배추는 그와 혼연일체가 되어 독보적으로 고소하고 짭짤하고 시원한 묵은지를 완성한다. 취향이 아닐 수는 있어도, 완성도에 대한 이견은 내놓을 데가 없는 김치다.
그 김치 좀 배워보려고, 김장철마다 일꾼으로 한 번 데려다 쓰시라 노래를 한 것이 두 해다. 올 해는 좀 불러 주시려나. 하도 무심하셔서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시는데.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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