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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꼰대의 거리에서 만난 튀김 장인 '김설문 일식'

단단하지만 연약하게 바삭거리는 튀김옷이 기분 좋게 부서졌다

2018.03.27(Tue) 11:02:36

[비즈한국] “여기는 도시의 거리 / 그대를 처음 만난 곳.” 어느 노래의 첫 소절인데, 멜로디가 자연스럽게 입에 따라 붙었다면 당신은 이미 ‘꼰대’로 분류되는 나이대에 속할 것이다. 가수 정수라가 1984년 발표해 1985년 크게 히트한 ‘도시의 거리’.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한국이 먹고살 만하고 잘나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기세등등한 쾌락주의적 노래들을 부르던 시기에 등장한 곡이다.

 

이 곡을 떠올리게 하는 동네가 내겐 서울 북창동이다. 온갖 유흥과 미식, 쾌락이 넘실대다 못해 퇴폐로 넘나들며 매일 밤 번쩍이는 불야성을 이뤘다던 동네. 시청 앞, 옛 삼성본관 건너편의 그리 크지 않은 지역. 자신의 삶, 그리고 가족과의 일상보다는 회사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올인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그 시절 산업역군들의 동네. 왠지 잘 씻지 않는 것 같은 입성에, 권위주의에 젖어 있으며 성공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약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1980년대풍 꼰대들이 서울 각지에서 몰려와 완장 권세를 부렸을 것 같은 동네.

 

‘김설문 일식’의 모듬회 세트 중 한 코스로 나온 튀김. 이 튀김을 먹기 위해 당일치기로 서울에 다녀가는 일본인도 있었다는 도시전설이 발굴되기도 한다. 사진=이해림 제공


낡은 네온사인 간판이 힘겹게 점멸하는 이 동네의 요즘 밤은 꽤 쓸쓸하다. 외국인 관광객, 아니면 근처 회사원들 정도다. 그 귀퉁이 골목에 ‘김설문 일식’이 있다. 당대의 특급호텔이었다는 무교동 서린호텔 일식부 총주방장 출신으로, 독립 후엔 시대를 풍미했던 튀김 전문점 ‘서린’ ‘뉴서린’을 차려 최전성기를 누리고 이제는 북창동에서 소박하게 일식 요리 인생을 이어가고 있는 요리사다. 

 

그에 관한 옛 기사들을 찾아보노라면 그의 튀김을 먹기 위해 당일치기로 서울에 다녀가는 일본인도 있었다는 도시전설이 발굴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도쿄에 당일치기로 가 초밥을 먹고 오는 것보다 훨씬 거리감이 컸을 텐데, 대단한 일이다.

 

국내 최초로 아이스크림 튀김을 고안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의 튀김 맛을 드디어 보러 갔다. 북창동 후미진 뒷골목 안에 자리한 그의 식당은 이제 꽤 늙었다. 모르고 우연히 들어갈 일이 없을 후진 골목 안의, 마찬가지로 우연히 들어가 볼 일이 없을 법한 쇠락한 식당을 가장하고 그는 여태 대체 어떤 튀김을 튀기고 있는 걸까. 

 

메뉴를 보자니 5만 5000원짜리 모듬회 정식에 사시미, 해산물, 구이, 튀김, 탕, 알밥, 후식이 골고루 쓰여 있었다. 생채소 스틱 한 접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콘버터 한 판, 새콤달콤한 폰즈 소스에 몇 가지 해산물을 가볍게 절인 전채까지는 여전히 평범한 척 가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가는 푸짐한 회에서부터. 딱 좋게 숙성해 달달한 감칠맛이 듬뿍 묻어나는 그의 회는 두껍지만 부드럽고 적정한 탄력을 지켰다. 일식 코스에서 들러리처럼 남용되곤 하는 장어구이도 제대로 포근한 맛이 젓가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튀김. 열빙어와 새우, 오징어에 고구마, 깻잎 정도가 나온 코스 일부로서의 튀김 한 접시였지만 명성을 체득하기에 충분했다. 튀김은 본디 물보다 끓는점이 높은 기름을 활용해 열과 수분을 제어하는 조리. 재료에 도는 기름기는 어디까지나 덤이다. 

 

단단하지만 연약하게 바삭거리는 튀김옷은 기분 좋게 부서졌고 속의 재료는 한결같이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상태로 익어 있었다. 계피향이 강하게 나는 맑은 튀김 간장 말고 새하얀 소금도 곁들여진다면 앉은 자리에서 서른 쪽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앞에 나온 회도 수준급이라 부른 배가 억울하진 않았다. 

 

평이하지만 정성을 갖춘 알밥에 진득한 탕까지 한 술 뜨니 아이스크림 튀김이 나왔다. 튀긴 도넛처럼 구수한 피 안에 아이스크림이 들어가 있는데, 그걸 가볍게 튀김옷을 묻혀 순식간에 튀긴다. 한 입 베어 물면 겉은 뜨겁고 안에선 차고 달콤한 것이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디저트치고 기름진 향이 다소 과했지만 이런 걸 요즘 어디서 먹어본단 말인가.

 

배가 차오르자 옆 테이블 아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끔한 입성에, 머리카락도 깨끗하게 정돈된 그들은 냄새가 날 것 같진 않아 보였고, 2차 할 곳을 찾아 우연히 들어온 근처 어느 무역회사의 산업역군들인 듯했다. 그 중 하나, 회사 누군가에 대한 시시한 이야기를 그토록 열 올리며 고성방가를 하는 아저씨는 마치 1980년대의 꼰대 유전자가 현대에 맞게 진화한 ‘뉴타입’처럼 보여 나는 노래나 흥얼거릴 일이었다.

 

“넘치는 잔마다 / 꿈이 피어나는 거리 / 가슴을 열어라 / 뜨거운 이야기는 / 우리의 고독을 씻어준다.” 

 

정수라가 노래하던 도시의 거리엔 이제 불이 꺼졌는데, 꼰대의 거리는 아직도 유효한 모양이다. 회사가 있고, 거기에만 매몰되어 있는 고독한 아저씨들이 있는 한은.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라이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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