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패션산업은 경기 변동에 민감하다. 소비자 취향에 따라 시장이 크게 변하고 진입 장벽이 낮은 데다, 브랜드의 기대수명이 짧아 다른 산업에 비해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하다. 뿐만 아니라 외주 의존도가 높고 상권의 매력도와 매장의 입지조건, 동일상권 내 경쟁 업체의 위치, 매장 규모 및 콘셉트 등이 경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최근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패션산업이 위축되자 패션기업들의 생존 전략이 중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소비자가 매장에 내점해 현장에서 자신에게 맞는 최상의 상품을 구매한다는 점을 중요시 여겨 정통 패션 산업에 주력해왔던 삼성물산 패션부문과 LF는 뒤늦게 온라인사업 강화에 나섰다. 또 K-뷰티의 열풍에 따라 중국, 파리 등 해외진출에도 신경쓰고 있다.
최근 2년 동안 외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베일에 감춰진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과 대학 졸업 후 반도상사(현 LG상사)에 입사해 대표이사로 올라선 오규식 LF 사장은 패션산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까. 이들의 생존 전략을 알아봤다.
# ‘패션퀸’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패션을 혁신하다”
국내 최고 재벌가의 둘째딸로 태어나 베일 속에 감춰져 있던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1973년생)이 처음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10년 1월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CES 2010)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우리 딸들 좀 광고하겠다”며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당시 제일모직・제일기획 기획담당 전무의 손을 잡고 나타난 것이다. 이듬해 1월 이서현 전무는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 3년 후인 2014년 1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공식석상에 등장할 때마다 이서현 사장의 패션은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검색어에 오를 만큼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2012년 6월 열린 ‘2012 제22회 호암상 시상식’에서 선보인 패션은 ‘백만 원 재벌패션’이라 불리며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이서현 사장이 입은 옷은 제일모직 브랜드 에피타프의 19만 원대 상의와 30만 원대 팬츠, 40만 원대 재킷이었다. 100만 원으로 재벌가 여성의 이미지를 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 국내 여성들은 이서현 부사장이 입은 에피타프 브랜드에 주목했고, 에피타프 블로그에는 순식간에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미국 파슨스디자인학교를 1997년 졸업한 이서현 사장의 패션 감각은 남달랐다. 이 사장이 부사장으로 승진하기 전까지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갤럭시 등 신사복 브랜드 의존도가 높았는데, 이 사장이 직접 구호(KUHO) 인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브랜드 포트폴리오 확대에 나서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여성복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했다. 이 사장이 발망(BALMAIN), 띠어리(THEORY), 구호 등의 자사 브랜드 의상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선 점도 수익구조 확대에 도움이 됐다.
이 사장은 성장 일로에 있던 빈폴(BEANPOLE)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빈폴의 업그레이드를 주문해 맨·레이디스·골프·액세서리·아웃도어 등 다양한 서브라인을 확장했고, 글로벌 브랜드화 전략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패션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서현 사장이 대기업에서 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됐던 여성복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성공작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2005년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를 설립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망한 국내 디자이너를 발굴·후원해온 점도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패션디자인펀드는 지난해까지 13년 동안 20팀의 디자이너들에게 290만 달러(약 31억 2000만 원)를 지원했으며, 정욱준, 두리 정, 스티브J & 요니P, 최유돈, 최철용, 계한희 등의 유망한 디자이너들을 후원했다.
그런 이서현 사장이 최근 2년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뒷말이 무성하다. 아버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와병과 성매매 동영상 보도, 오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재판 등으로 몸을 사리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새어나오고 있다. 이서현 사장이 마지막으로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16년 4월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2회 컨데나스트 럭셔리 컨퍼런스’에서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 관계자는 “최근 이서현 사장은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공식 외부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내 신진디자이너의 등용문이 되고 있는 프로그램 sfdf(스몰에스에프디에프)를 새롭게 만든 것은 물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이노베이션랩(Innovation Lab) 등 한국패션 발전을 위한 역할을 고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 직원들과 소통하는 소탈한 리더십 오규식 LF 대표이사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의 라이벌로 꼽히는 인물은 오규식 LF 대표이사 사장이다. 오 사장은 2012년 3월부터 구본걸 LF 회장과 함께 각자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오 사장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82년 서강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해 반도상사(현 LG상사)에 입사했다. 8년간 반도상사 심사과에서 근무한 오 사장은 1990년 뉴욕지사, 1996년 금융팀, 2001년 경영기획팀(상무), 2003년 IT사업부(부장), 2004년 패션부문 패션사업4팀(팀장)을 거쳐 2006년 LG패션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 3월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6년째 구본걸 회장과 함께 공동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다.
국내 패션업계가 침체됐던 시기에 대표이사로 취임한 오 사장은 사업 다각화를 통해 패션업계의 위기를 극복해나갈 방안을 마련했다. 전략 브랜드를 중심으로 브랜드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여 안정적인 패션사업을 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화장품·여행·외식 사업 등으로 사업을 넓혀가겠다는 것이다.
LF는 2017년 3월 ‘음식점업, 휴게음식점업 관련 직영점, 체인점, 대리점 운영업’, ‘호텔업, 관광숙박업, 관광객 이용시설업’, ‘오락, 문화 및 운동 관련 서비스업(테마파크 운영업)’ 등의 신규 사업을 추가했다. 패션에 국한하지 않고, 생활에 더욱 깊이 밀착해 고객에게 알맞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생활문화기업으로 새로운 미래를 써내려갈 계획이다.
2014년 3월 사명을 LG패션에서 ‘라이프 인 퓨처(Life in Future)’의 약자인 LF로 변경한 것도 생활문화기업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이서현 사장 취임 후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여성복 매출이 급증한 반면 LF는 오 사장 취임한 후 남성복, 여성복, 스포츠 및 아웃도어, 액세서리 등의 네 개 사업이 골고루 성장하는 성과를 이뤘다. LF몰은 헤지스, 닥스, 질스튜어트 등 LF 계열의 패션 브랜드는 물론 샤넬, 프라다, 구찌, 생로랑 등 해외 명품 브랜드를 판매할 뿐만 아니라 뷰티, 리빙, 비즈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 걸쳐 1300여 브랜드를 입점시켜 토털 패션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고가 브랜드 위주로 구성된 온라인몰 포트폴리오를 중저가 브랜드까지 확대하기 위해 2015년 하프클럽닷컴과 유아동전문쇼핑몰 보리보리 등을 보유한 트라이씨클을 인수해 온라인몰 플랫폼을 강화했으며, 라이프스타일 전문 동아TV를 인수해 콘텐츠 제작 역량도 확보했다.
오규식 사장은 직원들과의 격식 없는 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LF 관계자에 따르면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사업부 사무실에 사장실이 아닌 직원들과 동일한 책상을 마련해 놓았으며, 사업부별 업무보고 및 회의가 있을 때 오 사장이 직접 사무실을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들이 편하게 다가오도록 평소에는 유럽신사 느낌의 콤비 정장을 주로 착용하며, 넥타이는 메지 않는다고 한다.
LF 관계자는 “사장실이 마련된 본사 사옥으로 각 사업부 임원들이 이동할 때보다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며 “20~30대 젊은 직원들 못지않게 새로운 트렌드와 정보기술(IT)의 흐름에도 관심이 많은 트렌디한 감각을 갖췄으며, 평일 퇴근 후 직원들과 야구장에 가서 함께 놀 정도로 소탈한 리더십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경제의 기틀을 일군 기업들은 창업 1~2세대를 지나 3~4세대에 이르고 있지만 최근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서 가족 승계는 더 이상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카리스마 넘치는 ‘오너경영인’ 체제에 거부감이 커지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담당 업종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늘고 있다. 사업에서도 인사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전문경영인이며 그 자리는 뭇 직장인들의 꿈이다. ‘비즈한국’은 2018년 연중 기획으로 각 업종별 전문경영인 최고경영자(CEO)의 위상과 역할을 조명하며 한국 기업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유시혁 기자
evernuri@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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