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입사지원서를 넣었더니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다짜고짜 키랑 몸무게를 묻더라고요. 제가 키가 좀 작은 편이에요. 그쪽에서 제 키랑 몸무게를 듣더니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더라고요.”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김 아무개 씨가 지난해 D 의류회사에 지원했을 때 겪은 일이다. 사실 옷 만들 때는 입혀볼 모델이 필요하다. ‘키 크고 날씬한 디자이너’를 뽑으면 돈 주고 피팅모델을 쓸 필요가 없다. 김 씨가 황당한 일을 당한 이유다.
패션계의 부조리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아침 9시부터 밤 8시까지 뼈 빠지게 일해도 견습생은 10만 원, 인턴은 30만 원, 정직원은 120만 원을 받는다. 몇 해 전 한 유명 디자이너의 디자인실 ‘열정페이’ 문제는 그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도제식 시스템 속 ‘슈퍼 을’인 디자이너 지망생은 적게 받고 많이 일하면서도 자기 옷을 만들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이다.
“디자인실 견습생으로 일하면 단추 개수 세는 잡일만 한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이 길이 맞나?’ 매일 고민한다는 거예요. 3년 동안 디자인 참여를 못 해보고 나온 사람도 봤어요. 옷을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꿈이 짓밟힌 거죠. 제가 청년 디자이너들에게 꿈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신민정 라잇루트 대표(29)는 패션 ‘파워블로거’였다. 자취방 선정 기준이 벽장 유무일 정도로 옷을 좋아하는 그는 옷을 입어보고 소개하는 블로그를 운영했다. 하루 평균 방문자가 7000명, 블로그가 크면서 자기가 만든 옷을 소개해달라는 무명 디자이너 요청이 줄을 이었다. 이때 무명 디자이너의 고충을 듣게 된 그는 2016년 9월 라잇루트를 차렸다.
라잇루트는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이 ‘자기 옷’을 만들 수 있게끔 돕는 플랫폼이다. 과정은 이렇다. ‘교육생’을 뽑아 3개월간 지원한다. 교육생이 옷을 만들어 내면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을 통해 일반에 판매하고 수익금 중 14%를 교육생에게 돌려준다. 나머지는 회사 운영과 다음 교육생을 위해 쓰는 구조다. 매년 10명씩 두 번, 20명의 교육생을 배출한다. 지망생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경쟁률이 점점 높아져 올해는 5 대 1을 기록했다. 지원자는 21세부터 34세까지 다양했다.
“기회가 너무 적어요.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한 사람도 졸업 작품을 제외하곤 옷을 만들어 볼 일이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패션을 전공해도 샘플도 못 만드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경력을 쌓을 곳이 없는 거죠. 저희는 교육생이 실제로 옷을 만들어볼 수 있게끔 전문가를 통해서 다자인, 생산, 판매. 처음부터 끝까지 지원하고 있어요. 원하는 핏을 만들기 위해 어떤 원단을 써야 하는 지, 대량생산되는 옷을 만들 때 피해야 하는 디자인은 무엇인지 같은 실무적인 노하우를 전달해요.”
교육생 한 명 당 들어가는 비용은 평균 130만 원.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에서 가져가는 판매 수수료가 30~35%인 점을 감안하면 ‘교육생 지원 사업’은 늘 적자다. 라잇루트는 수익을 내기 위해 기업이나 정부 기관에서 들어온 디자인 의뢰를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연결해주거나, 단체복을 제작·판매하는 사업을 함께 진행한다.
“교육생이 디자인한 옷에 대한 사람들 반응이 좋아요. 근데 기본적으로 수익이 나려면 규모가 좀 더 커져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하죠. 사실 단체복 사업만 놓고 보면 수익이 괜찮지만, 교육생 사업에서 난 적자를 메우기에 빠듯해요. 그래도 교육생 지원 사업은 포기 못 해요. 그 부분이 없으면 이 사업을 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정말 해결하고 싶은 문제거든요.”
라잇루트는 사회적 기업이 만든 옷은 비싸고 디자인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깼다. 최근 유명 아이돌 그룹에게 협찬을 요청받은 것. 오로지 디자인으로 승부를 봤다.
“세븐틴, B1A4, 하이라이트, 몬스터엑스, 케이윌. 최근엔 유명 아이돌 협찬을 시작했어요. 회사를 소개할 때 일부러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을 안 넣어요. 사람들이 편견을 갖거든요. 정말 경쟁력 있는 디자인으로 평가받고 싶었어요. (국내 유일한) 외상응급센터 의사로 유명한 이국종 교수님 팀복을 제작하게 됐는데,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정말 뿌듯하다고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라잇루트에 디자인을 제공한 디자이너가 받아가는 판매 수수료는 30만~200만 원 사이. 건당 수익을 얻는다. 몇몇 디자이너 빼곤 넉넉한 돈을 받아가진 못하지만, 자신의 옷을 만드는 커리어를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 지망생 사이에서 호응이 좋다. 평소 ‘고맙다’는 문자를 많이 받는다는 신 대표는 오히려 미안한 감정을 드러냈다.
“여기서 만든 작품이 자기 포트폴리오가 되고, 커리어가 되죠. 그 덕분에 회사에 취업했다고 ‘고맙다’는 문자가 많이 와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제가 디자이너들께 생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을 주고 있잖아요. 사실 디자인 값을 더 받아가야 하거든요. 좀 미안하죠. 그럴 때마다 제가 얼른 회사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회사가 망하면 자신의 생계가 아닌, 무명 디자이너가 설 자리가 없어질까 봐 두렵다는 신 대표. 인터뷰 내내 웃는 얼굴이었지만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패션 업계가 건강해졌으면 좋겠어요. 디자이너 처우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혼자선 좀 버겁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는 인터뷰 끝 무렵 힘주어 말했다.
“힘들긴 해도 후회는 안 해요. 조난을 당한 사람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었을 때 죽는다고 해요. 청년에게 꿈이란 그런 것 같아요. 꿈을 잃으면 죽은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꿈을 지켜주고 싶어요.”
박현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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