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우리 사회에 아직도 만연한 ‘갑을문화’를 타파하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 ‘리젝션 피(Rejection Fee)’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지난 8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광고, 홍보 등 PR 업계의 리젝션 피 제도가 시급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광고, 홍보, 마케팅 대행 종사자들의 공감을 얻으며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활발한 공유가 벌어졌다. 2월 20일 현재 청원에 참여한 사람은 8500명 정도. 정부의 공식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기준인 20만 명을 돌파할 가능성은 낮지만 이러한 문제제기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적극적으로 쏟아진다.
‘리젝션 피’는 직역하면 ‘거절 비용’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의미를 구체화한 ‘탈락보상금’이라는 용어로도 대체된다. 해외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공개 입찰 과정에서 탈락한 기업 혹은 개인에게 리젝션 피를 지급하는 문화를 일컫는다.
경쟁 입찰은 대단히 익숙한 프로젝트 주체 선정 방식이다. 정부 및 공공기관의 경우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공사의 경우 5억 원)일 경우 반드시 공개 경쟁 입찰을 하도록 돼 있다. 사기업 역시 보다 경쟁력 있는 외주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흔히 ‘경쟁 프레젠테이션’이라고 불리는 입찰 제도를 곧잘 활용한다.
광고, 홍보, 마케팅 등의 외주를 맡아 사업을 진행하는 대행사(에이전시)의 경우 경쟁 입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짧게는 1, 2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발표를 준비한다. 당연히 적잖은 인력이 투입되고, 각종 제작비가 든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사업을 따낼 경우 추후 사업비를 통해 어느 정도 보전이 이뤄지지만, 탈락할 경우에는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다.
문제는 최종 업체에 선정되기 위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A 광고대행사 관계자는 “TV 광고의 경우 과거에는 콘티 수준으로만 아이디어를 제시 했지만, 요즘은 아예 60~70%의 완성도를 가진 영상을 자체 비용을 들여 미리 제작해야 한다”며 “다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수주를 위해서는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 비용도 문제지만 아이디어 도용이 더 심각
홍보, 광고, 마케팅 등 대행업 종사자 들은 리젝션 피에 대해서는 대부분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물론 클라이언트가 되는 대기업 관계자들의 생각은 다소 달랐다. 여기에는 몇 가지 주장과 반론, 그리고 재반론이 존재한다.
리젝션 피 도입에 대해 가장 우려하는 지점 중 하나는 실효성이다. 안 그래도 매번 비용을 깎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클라이언트가 과연 리젝션 피를 지불하려고 하겠느냐는 지적이다. 만약 법적으로 반드시 리젝션 피를 줘야한다면 입찰 기업 수를 최소화하거나, 혹은 수의 계약이 더욱 많아져 중소 혹은 신생 기업에게는 더욱 기회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업계에서 미리 선정업체를 정해두고 경쟁 입찰을 진행하는 ‘짬짜미’가 이미 판을 치고 있고, 다른 업체는 들러리만 서는 경우도 적잖다는 것. 애당초 작은 업체에게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리젝션 피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허울뿐인 경쟁 입찰을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가령 리젝션 피만을 노리고 부실 입찰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해외에서도 리젝션 피 자체가 회사를 운영할 정도로 많이 책정되지 않고, 입찰 자격 자체도 기업에서 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가능성은 낮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오히려 도덕적 해이는 클라이언트가 더욱 심각하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해 B 광고회사는 C 교육기업으로부터 새로운 광고 제작과 관련해 단독 입찰 제안을 받았다. B 사는 정성껏 시안을 준비해 발표를 진행했지만, C 기업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광고 프로젝트 자체를 아예 취소해 버렸다. 수개월 후 B 사는 C 사의 광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앞서 발표한 광고의 핵심 키워드와 슬로건이 그대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정이 되지 않더라도 입찰 기업의 아이디어만 베끼는 경우가 적잖다. D 마케팅 기업 실무자는 “아무리 공들여 아이디어를 만들어갔다고 해도 입찰에서 떨어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중에 해당 기업이 아이디어를 버젓이 사용하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며 “심지어 어떤 클라이언트의 경우에는 탈락시켜놓고 나중에 PSD(포토샵 포맷) 파일을 요구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E 대행사 마케터의 증언은 더욱 충격적이다. 과거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클라이언트로부터 경쟁 입찰에서 다른 대행사로부터 제출받은 제안서를 들고 찾아와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대신 해줄 수 없느냐는 문의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유로는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거나 향후 관계 때문이라고 답했다. 여기에 아이디어만 갖고는 권리를 주장하기에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더해졌다. 클라이언트도 이러한 약점들을 교묘히 악용한다. 이처럼 아이디어나 시안 등 완성되지 않은 콘텐츠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와 벙어리 냉가슴 앓는 갑을관계 속에서 리젝션 피는 결국 최소한의 보상이라는 주장이다.
# 정부, 공공기관 앞장서야 분위기 조성될 것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모든 대행사 관계자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리젝션 피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점. 심지어 15년 이상 경력을 가진 홍보대행사 임원은 리젝션 피라는 용어에 대해 지난해 처음 들어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일부 의식 있는 스타트업 등에서 리젝션 피를 지불한 사례도 있지만, 거의 없다고 보면 맞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다른 한 가지는 인터뷰에 응하는 조건으로 반드시 익명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직 우리 사회에 리젝션 피를 요구하기는커녕, 아직 말조차 크게 하기 어려운 갑을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과연 사기업을 대상으로 탈락 업체에게 리젝션 피를 강제로 주도록 법제화 하는 것이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실효성이 있는가도 따져봐야 할 부분이다. 결국 기업들은 리젝션 피를 아끼기 위해, 얼마든지 또 다른 편법을 찾아낼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 E 대행사 대표는 “리젝션 피 문화가 정착된 다른 나라의 경우 에이전시의 규모나 명성에 따라 지불 액수에도 차등을 두기도 한다”면서 “법제화보다는 리젝션 피가 없는 기업에는 처음부터 다 같이 응찰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F 마케팅 대행사 부장은 “정부와 공공기관이 먼저 나서서 리젝션 피를 전체 사업예산에 포함해서 편성하면 자연스럽게 리젝션 피 문화가 형성될 것으로 본다”며 “단순히 대행사의 수익을 보전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갑을문화가 완화되는 장치로서 정부나 국회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봉성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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