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한민국 경제의 기틀을 일군 기업들은 창업 1~2세대를 지나 3~4세대에 이르고 있지만 최근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서 가족 승계는 더 이상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카리스마 넘치는 ‘오너경영인’ 체제에 거부감이 커지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담당 업종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늘고 있다. 사업에서도 인사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전문경영인이며 그 자리는 뭇 직장인들의 꿈이다. ‘비즈한국’은 2018년 연중 기획으로 각 업종별 전문경영인 최고경영자(CEO)의 위상과 역할을 조명하며 한국 기업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가전의 왕’은 텔레비전(TV)이다. 아무리 스마트폰이 많이 보급됐다고 해도, 여전히 TV가 없는 거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꾸준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화면 크기는 계속 커지고, 화질을 더욱 선명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TV는 외부 충격이나 내부에 모터가 없는 거치형 가전제품이다 보니 비교적 수명이 길다. 기업들이 끊임없이 신기술 개발에 매진하는 이유도 교체 수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2005년 이후 전 세계 TV시장의 1위와 2위 자리는 언제나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차지다. 소니, 샤프, 파나소닉과 같은 일본 기업의 추격을 저만치 뿌리치며 마치 우리나라 쇼트트랙이나 양궁과 같이 압도적인 격차를 벌려왔다. 각종 신기술을 가장 먼저 도입하고, 화면 크기를 경쟁적으로 늘리면서 가격 경쟁력까지 갖췄으니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우리 가전 기업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14년부터 전 세계 TV 판매량이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가격을 무기로 삼은 중국 기업들의 공세도 거세지만, 전통적인 TV 강자인 일본 기업들도 부활의 움직임을 보인다. 한국 최고의 TV 전문가로 꼽히는 두 인물. 김현석 삼성전자 소비자 가전(CE)부문장 사장과 권봉석 LG전자 홈 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장 사장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 김현석 삼성전자 CE 부문장
어느 조직에나 흔히 말하는 ‘성골’이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TV가, LG전자는 생활가전이 이에 해당한다. 1992년 디스플레이사업부 엔지니어로 입사한 이래 줄곧 TV 관련 부서에서 일해 온 김현석 사장은, 올해 초 삼성전자 각자대표에 올라 삼성전자 ‘삼두경영’ 체제의 한 축을 맡게 됐다. ‘보르도 신화’로 유명한 최지성 부회장, ‘초격차’ 전략을 실현한 윤부근 부회장에 이어 세 번째로 삼성전자 가전 사업을 총괄하는 지휘봉을 잡았다. 윤 부회장의 한양대학교 이공계열 후배이기도 하다.
지난해까지 CE부문장을 맡았던 윤부근 부회장이 ‘윤푸근’이라는 별명처럼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바통을 넘겨받은 김현석 사장은 좀 더 공격적이고 경쟁의식이 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사건이 3D 기술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 2011년 불거진 ‘멍청한 XX’ 발언이다. 당시 전무였던 김 사장은 보도 직후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LG디스플레이가 이를 받아들이며 일단락 됐지만, 그가 전문가로서 기술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강하지를 엿볼 수 있는 해프닝으로 남게 됐다.
3D 논쟁 이외에도 LED 백라이트 배치 문제부터 최근 QLED에 이르기까지 TV는 늘 기술 우위 논쟁이 첨예한 분야다. 특히 그때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매번 다른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늘 시발점이 된다. 그때마다 김현석 사장은 전문가로서 단 한 번도 몸을 사린 적이 없다. 늘 논쟁의 중심에서 자사 기술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알려왔다.
김 사장은 올해부터 TV뿐만 아니라 가전사업 전체를 총괄해야 하는 입장이다.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지난 2017년 삼성전자 연간 실적을 보면 CE부문 매출은 45조 11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제자리인 반면, 영업이익은 1조 6500억 원으로 2016년 기록한 2조 7100억 원보다 무려 39.1%나 감소했다.
특히 삼성전자가 양자점 기술을 응용해 지난해 초 야심차게 선보인 QLED TV가 경쟁사인 LG전자의 OLED TV와 비교해 화질 및 기술적 특성 면에서 업계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이 큰 골칫거리로 보인다.
워낙 경쟁이 치열하고 이익률이 낮은 분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뚜렷한 돌파구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김 사장은 지난 5일부터 27일까지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리는 삼성 포럼에 참가해 사물인터넷(IoT)와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전사적 역량을 결집할 계획이라고 청사진을 밝혔다.
세계적인 시장 흐름이나 삼성전자의 글로벌 리더십을 감안하면 전략적 방향은 크게 무리가 없어보지만 여전히 이를 영업이익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올해가 김 사장에게는 가장 힘든 한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 권봉석 LG전자 HE 사업본부장
전 세계 TV 시장의 성장세가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LG전자는 그 어떤 TV 제조기업보다 즐거운 한 해를 보냈다. 한때 적자에 몰리기도 했던 영업이익률이 이제는 10%를 넘볼 정도로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권봉석 LG전자 HE사업본부장이 있다.
1987년 LG전자에 입사한 권 사장은 디스플레이와 관련 업무를 해오다가, 지난 2007년 모니터사업부장을 맡아 LG전자를 전 세계 PC 모니터 시장 1위로 키우는 공을 세운다. 이후에는 디스플레이 분야를 벗어나 모바일 커뮤니케이션(MC) 상품기획그룹장에서 초기 G시리즈 기획을 주도하고 (주)LG 시너지 팀장 등을 맡는 등 ‘조커’처럼 적재적소에 투입돼 늘 성과를 거둔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소 업무 스타일이나 리더십 역시 비교적 온화한 편이지만,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는 상당히 꼼꼼하게 검토하는 타입으로 알려져 있다.
권 사장이 지난 2015년 초 HE사업본부를 맡았을 때만 해도, 그해 HE사업본부의 영업이익률은 0.3%로 사실상 간신히 적자를 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2016년 7.1%(1조 2374억 원), 2017년 8.4%(1조 5667억 원)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가전 분야에서는 꿈의 이익률로 일컬어지는 10%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이익률 개선에는 OLED TV를 중심으로 프리미엄 시장에 집중한 전략이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 가장 일반적이다. 특히 경쟁사인 삼성전자의 QLED TV에 비교해 자발광 특성에 따른 우수한 명암비와 백라이트가 없어 두께를 더욱 얇게 만들 수 있는 점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OLED TV의 약점으로 지적된 비싼 가격도 LG디스플레이의 긴밀한 협력과 생산 수율이 크게 개선되면서 안정세에 접어드는 분위기다.
다만 불안요소가 아주 없지는 않다. 안정적인 영업이익률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를 제치고 시장 선두로 치고 나가지는 못하는 상황. IHS, GFK 등 각종 시장조사기관의 지난해 TV 시장 전망을 종합해보면, 삼성전자가 불안한 1위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LG전자 역시 압승을 거뒀다고 평가받는 지난해에도 결국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성장이 감소세에 접어든 상황에서 영업이익률을 높인 것은 매우 영리한 전략이지만, OLED TV 경쟁에 뛰어든 소니 등 해외 기업들의 추격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봉성창 기자
bong@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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