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한민국 경제의 기틀을 일군 기업들은 창업 1~2세대를 지나 3~4세대에 이르고 있지만 최근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서 가족 승계는 더 이상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카리스마 넘치는 ‘오너경영인’ 체제에 거부감이 커지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담당 업종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늘고 있다. 사업에서도 인사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전문경영인이며 그 자리는 뭇 직장인들의 꿈이다. ‘비즈한국’은 2018년 연중 기획으로 각 업종별 전문경영인 최고경영자(CEO)의 위상과 역할을 조명하며 한국 기업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국내 빅3 백화점 CEO들은 저마다 색깔이 뚜렷하다. 백화점은 유통 기업들의 주력 사업이라 오너들의 입김이 센 편인데, 지금의 세 백화점 수장들은 각각 특화된 강점이 있어 ‘오너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는다.”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 최고경영자들에 대한 한 백화점 임원의 말이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모으면, 세 명의 CEO는 ‘백화점맨’으로 비슷한 길을 걸어왔지만 전문 분야가 각각 다르다. 강희태 롯데백화점 사장은 중국 사업, 장재영 신세계백화점 사장은 마케팅과 프로젝트, 박동운 현대백화점 사장은 영업 분야에서 업계 ‘통’으로 불린다.
# ‘변화의 바람’ 부는 백화점 업계
그동안 매출 기준 빅3 백화점 순위는 ‘롯데-현대-신세계’ 순이었다. 롯데백화점이 단독 1위 자리를 꾸준히 유지해왔고, 현대와 신세계가 늘 근소한 차이로 2위 자리를 다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17년 3분기 실적 기준으로 여전히 롯데백화점이 1위를 지켰지만 유일하게 매출과 영업이익이 감소한 성적표를 받은 반면, 신세계백화점은 현대백화점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백화점은 백화점 매출에 아웃렛 매장 실적이 함께 집계된다. 백화점 매출로만 보면 신세계가 현대를 이미 넘어섰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올해를 기점으로 이 변화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세 CEO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반대로 2017년은 중국 사드 보복 사태와 전반적인 업황 침체기가 동시에 겹쳤지만 연말부터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해 업계 일각에선 “올해부터 CEO들이 각각의 강점을 제대로 발휘하고, 그에 따른 성적표를 받아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 업계 1위 백화점 수장, 강희태 롯데백화점 사장
롯데백화점은 롯데그룹 최고 핵심 계열사인 롯데쇼핑의 자회사다. 강희태 롯데쇼핑 대표이사 사장(59)은 백화점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강 사장은 롯데백화점에서 ‘정통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1987년 롯데쇼핑에 입사해 같은 곳에서만 30년을 일했는데, 특히 백화점 사업에서 매출 비중이 가장 높아 요직으로 꼽히는 여성복분야를 비롯해 잠실점장, 소공동 본점장, 영남지역장 등을 거쳤다. 롯데쇼핑 대표이사, 롯데백화점 사장직에 오른 건 2017년 2월이다. 비슷한 연배의 롯데백화점 동기 가운데 가장 먼저 수장 자리에 올랐다.
사내에서 신망도 두텁게 쌓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강 사장과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롯데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평소 온화한 성격이지만 업무를 추진하거나 결단을 내릴 땐 냉정하게 처리하기도 했다. 가끔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내에서 가장 좋은 평가가 나오는 리더 가운데 한 명”이라고 말했다.
강 사장의 강점은 앞서의 현장 경험과 리더십 등이 아닌 다른데서 꼽힌다. 중국 사업에서만큼은 업계에서 가장 전문가로 꼽힌다. 2014년 8월부터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3년간 차이나(중국)사업부문장을 맡고 현지 백화점 사업을 이끌어 왔다. ‘중국통’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하지만 사장 취임 첫 해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지난해 롯데백화점은 3분기 연결기준 매출 1조 9020억 원, 영업이익 570억 원을 기록해 2016년 같은 기간 대비 각각 3.6%, 8.6% 감소했다. 특히 영업이익은 1분기부터 3분기까지 내리막길이었다. 지난해 4월부터 장기화한 ‘사드 보복 사태’로 중국인 관광객 매출이 크게 감소한 데 따른 것이란 게 업계 분석이다.
중국 사업을 통한 실적 개선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실적 악화는 해외사업 부진도 영향을 미쳤는데, 영업손실 대부분은 강 사장이 맡았던 중국 쪽에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올해 롯데그룹 인사를 앞두고 업계에선 “강 사장에게 경영상 책임을 물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롯데백화점 해외사업은 3분기 180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2016년 같은 기간(200억 원)보다 20억 원 줄었지만 여전히 마이너스다.
지난해 말 ‘평창 롱패딩’ 열풍 등 새 전략에 힘입어 4분기 실적은 다소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롯데백화점의 4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영업실적 반등을 이끌어낸 새 전략이 올해에도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평창 롱패딩은 단순 유통에서 벗어난 직매입 방식이었고, 최근 가능성이 확인 됐지만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당장은 평창 롱패딩 같은 새 기획에 대한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그동안 부동산 임대 방식과 같이 입점매장 매출의 20~40%에 해당하는 수수료에 매출 대부분을 기대오는 등 전통적인 수익구조에만 매달려 변화에 느린 점이 약점으로 꼽혀왔다. 업계에선 중국 사업은 물론, 경영전략 다변화에 대한 강 사장의 ‘냉정한 결단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홀로 웃는’ 업계 최장수 CEO, 장재영 신세계백화점 사장
신세계백화점은 빅3 백화점 가운데 가장 분위기가 좋다. 지난해 3분기 연결기준 매출액 4426억 원, 영업이익 371억 원으로 2016년 같은 기간 대비 각각 8.6%, 4.5% 늘었다. 증권가에선 4분기 실적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2017년 사상 최악의 백화점 사업 침체기 속에서 유일하게 ‘실적 상승’이라는 성적표를 받으면서 업계에서 ‘놀랍다’는 반응이 나온다.
신세계백화점 성적은 장재영 신세계백화점 사장이 이끌었다는 평가다. 장 사장은 업계 최장수 CEO로, 2012년 12월부터 5년째 회사를 이끌고 있다. 오너 일가인 정유경 신세계그룹 총괄사장이 맡고 있는 패션 사업이 최근 전면에서 주목 받고 있지만, 업계에선 장재영 사장의 노련한 경영 노하우가 신세계백화점 실적은 물론 정유경 총괄사장의 안정적인 경영 안착에도 기여했다는 말이 나온다.
장 사장은 ‘마케팅 전문가’로 손꼽힌다. 1984년 신세계에 입사해 2004년 미아점장에 취임했다. 이후 마케팅 실적을 인정받아 1년 만인 2005년 마케팅담당 상무보, 2007년엔 상무로 승진하는 등 3년 사이 점장에서 상무까지 초고속 승진했다.
그는 2012년부터 신세계 대표이사로 재직하며 영업전략실장, 상품본부장을 겸직했고, 2015년 말 사장으로 승진했다. 50대 초반의 젊은 판매본부장 출신이 대표이사까지 오르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장 사장의 ‘마케팅’ 전략은 실적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매출과 효율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모바일에 집중하는 등 변화에 빠르게 대응한 ‘장재영 표 마케팅 전략’ 덕이라는 게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신세계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2016년 12월 개장한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이 대표적인 사례”라며 “100일 만에 방문객 1000만 명을 넘겼다. 사내에선 단순한 판매행사보다 문화행사에 주력한 장 사장의 마케팅 전략이 먹혔다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마케팅에서 연결된 ‘공격 경영’도 장 사장의 강점으로 꼽힌다. 본점·센텀시티점 식품관 리모델링, 강남점 증축, 센텀시티몰·김해점·스타필드 하남점·대구점 오픈 등이 단적인 예다. 최근에는 1800억 원을 투입해 가구업체 까사미아를 인수하면서 홈퍼니싱 시장에도 진출했다.
신세계백화점의 까사미아 인수·합병(M&A)은 2012년 리바트를 인수한 현대백화점, 이케아 매장 옆 롯데아울렛을 열었던 롯데 등 경쟁 업체들 보다 늦고, 인수 업체 인지도도 상대적으로 낮지만 ‘신세계의 고급 브랜드화’라는 장 사장의 전략 안에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이토록 잘나가는 장 사장의 2018 전략은 뭘까. 신세계백화점 측은 “까사미아는 물론, 패션, 란제리 등 새 트렌드를 만들 것”이라며 “(장 사장이) ‘신세계’라는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 데 집중하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 업계 침체기 속 내실 다지기 집중, 박동운 현대백화점 사장
박동운 현대백화점 사장은 업계에서 ‘영업통’으로 불린다. 이 별칭은 경쟁업체 CEO들과 달리 전국 점포를 두루 맡아온 그의 경험에서 나왔다. 1985년 현대백화점에 입사한 박 사장은 2006년 현대백화점 울산점장, 2008년 강남 무역센터점장, 2010년 압구정 본점장, 2012년 상품본부장 등을 거쳤다.
현대백화점은 2016년 말 ‘국정농단 게이트’로 범 현대가 전체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실을 다지겠다”며 기존보다 3주 앞당겨 인사를 진행했는데, 박 사장이 그 책임을 맡았다.
박 사장은 현대백화점이 옛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지 약 20년 만에 처음으로 등장한 현대백화점 출신 사장이기도 하다. 정몽근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 등 오너일가 두 명을 제외하면 현대백화점 출신 임원이 사장에 오른 사례는 없다. 박 사장이 승진하기 전 사장단 임원들은 대부분 현대그룹이나 현대건설 출신이었다.
박 사장은 취임 이후 롯데, 신세계와 달리 신규 복합쇼핑몰 진출보다 내실 다지기에 집중하고 있다. 유통업이 침체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복합쇼핑몰 시장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현대백화점은 2020년에 개점하는 현대백화점 여의도점을 끝으로 최소 4~5년 내에는 백화점을 열 계획이 없다.
박 사장은 상생경영도 강조한다. 지난해 현대시티몰 가든파이브점 개점 계획을 밝히는 자리에서 매출의 일정 부분을 수수료로 중소상인들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한 점이 대표적 사례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상생을 기본 가치로 두고 꾸준히 중소상인들과의 협력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박 사장의 ‘내실 다지기’가 실적에도 반영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3분기 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매출 4222억 원, 영업이익은 695억 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0.3%, 15.1% 감소했다. 전반적인 소비심리 악화로 인한 매출 감소로 영업이익이 줄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업계에선 매출이 높은 판교점과 티큐브점 등 일부 점포를 제외한 대부분의 점포들이 경쟁사 대비 경쟁력이 약화돼 매출 감소를 보였다고 분석한다. 또 추가 출점이 없어 외형 성장에도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증권가에선 “현대백화점의 실적 부진이 최악을 지났다”며 4분기 실적은 2016년 같은 기간보다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백화점 업계 다른 관계자는 “내실을 다지고 안정을 찾는 경영 전략에 대한 효과는 상대적으로 늦게 나올 수 있다”며 “박 사장의 임기가 상대적으로 짧았던 점을 감안하면 올해가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시기라고 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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