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은둔 고수’ 성북동 이종국 선생이 식당을 열었다. 성북초등학교 삼거리에 4층 규모 건물 한 채를 모두 식당으로 꾸렸다. ‘한식 테마파크’라는 것이 제대로 지어진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구성이다. 상호는 ‘이종국 104’.
이종국 선생, 아마 보통 사람들에겐 낯설 것이다. 그간 성북동 산자락의 별세계 같은 저택에서 VVIP를 위한 프라이빗 디너, 쿠킹 클래스를 하며 일부 계층에서만 구전되는 명성을 쌓았다.
잠시 세상에 나왔을 때 모두가 알 만한 큰 이름을 만들었던 것이 여의도 전경련 회관 최상층의 ‘곳간 by 이종국’.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이 처음부터 별 둘을 달아줬던 곳이다. 현재는 그의 이름을 떼고 그저 ‘곳간’이다. 웨스틴조선 서울이 100주년 기념 갈라디너를 열 때 ‘모신’ 요리사 역시 그였다.
건물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야를 빼앗는 것이 그간 이종국 선생이 모은 각 지역의 다양한 소반. 하나하나가 고미술품이다. 이런 기물뿐 아니라 4층까지 공간을 모두 메운 그림과 가구, 꽃 하나하나까지 모두 이종국 선생이 오랜 안목으로 수집한 것들이다. 위압적이지는 않다. 좋아 보이는 물건을 보면 그저 가격이 궁금하고 말 뿐인데, 좋은 물건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먼저 마음을 빼앗긴다. 참으로 수더분한 존재감이다.
음식 또한 결이 같다. 캐주얼 다이닝부터 파인 다이닝, 그리고 프라이빗 다이닝으로 나뉜 ‘이종국 104’의 가장 비싼 코스 요리는 30만 원 이상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다. 국내 한식 레스토랑 중 가장 비싼 축이다.
간단한 단품 요리(세 가지 전식과 제철 죽, 샐러드, 후식이 포함돼 있어 실제로는 짧은 코스라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된다)인 벌교 꼬막장 비빔밥을 선택해도 4만 원이 되는데, 얄궂은 것은 그의 음식을 먹으면서 가격, 즉 본전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물건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홀리듯이, 그의 음식은 오로지 맛으로 사람을 홀린다. 진귀한 재료와 끈질긴 세공으로 값어치를 높여 놓은 음식을 도예가의 작품에 담아 설렐 정도로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차림으로 내 오는데, 이게 정말 요상하단 말이다. 먹고 나면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것만 같이, ‘맛있었다’는 단순한 기분 외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먹기 전 경건하게 사진을 찍어놔야 나중에도 간신히 기억이 날 정도다. 매번 거기에 세뇌되어, 그 비싼 밥을 먹으면서도 그저 외할머니 밥을 먹는 것처럼 머리와 마음이 무장해제 되어버리니 약이 오를 지경이다.
외할머니 밥과 상통함도 사실이다. 배려가 담겨있는 음식이다. 대가족시대,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모든 외할머니들이 그리 했듯 철마다 가장 좋은 것만 전국에서 구해다 갖가지 방법으로 저장해둔 식재료는 감동적이다. ‘시간과 정성’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되살려내는 시간, 그리고 정성이다.
맛은 또 어떠한가. 외할머니 밥과 매한가지로 편안하게 입에 붙고 속에 편안히 붙는다. 이종국 선생의 밥을 처음 먹은 이들이 가장 놀라는 부분이다. 입 안에 역한 향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마늘이나 생강 같은 강한 향신채는 즙을 내어 쓴다. 짠맛을 줄이고 신맛을 잘 활용하는데, 억제된 발효로부터 나온 신맛에선 격조마저 느껴진다. 이런 양념은 결코 사람의 속을 거칠게 긁지 않는다.
한식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이종국 선생의 음식을 대하고 보면 ‘모던 한식’의 효용이 의심스러워진다. 이종국 104의 음식은 철저히 한국적이다. 시대에 맞춰 필요한 수입 식재료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뿐이다.
접시에 소스 한 번 긋지 않은, 온전히 한식다운 한식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파인 다이닝이 됨을 그가 알려준다. 한식으로 빛을 보고자 하는 요리사들이라면 꼭 한 번 이종국 선생의 한식 세계관을 경험해보면 좋겠다.
여운까지 맛있게 밥을 먹고 성북동을 벗어나며 결심했다. 꼭 그의 프라이빗 다이닝을 경험해보리라. 코스가 좀 더 길고, 정교하며, 한층 더 진귀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차이라고 하니 그 향연은 완성도 높은 공연을 R석에서 보는 만큼의 환희를 안겨줄 터다.
하여 하루에 5000원씩 모으기로 했다. 그럭저럭 마실 만한 와인까지 곁들인다 치면 넉 달쯤 모으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땐 꼭 ‘맛있었다’ 같은 천치 같은 감상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싶은데, 아마 안 되겠지. 또 맛에 홀려 넋을 빼고 말겠지.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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