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모 운용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외국계 증권사 덕분에 중국 상하이와 쑤저우 일대 중국 전자기업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상하이에서 방문한 기업은 메모리용 반도체(DRAM) 생산 공장을 짓는 중이었다. 이미 투자된 돈만 1조 원이 넘는 수준이었으니 상당한 규모였다. 공사 현장에서 만난 이 회사의 사장은 10년 내로 DRAM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꿈꾼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다음 세계 DRAM 시장 점유율을 살펴보면, 중국기업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2017년 3분기 말 기준으로 보면 삼성전자가 45.8%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그 뒤를 SK하이닉스(28.7%), 그리고 미국의 마이크론(21.0%)이 잇고 있다. 4위는 2.3%의 점유율을 기록한 대만의 난야이며 5위는 0.9%를 기록한 대만의 윈본드다. 참고로 2013년 점유율 순위를 보면 삼성전자(32.7%), SK하이닉스(30.0%), 마이크론(12.9%)으로 불과 4년 사이에 DRAM 시장이 상위 3개사 위주로 재편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의 기업들은 세계 DRAM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경영학 콘서트’의 저자 장영재 박사는 공정기술, 정확하게 말해 ‘제조운영 기술’ 부문에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의 기업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한국 기업들이 처음부터 우월한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삼성전자의 ‘제조 사이클 타임’이 세계 최악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시작된 반도체 가격 폭락사태로) 삼성전자에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을 때, 또 하나의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미국 버클리 대학이 발표한 ‘세계 반도체 생산성 분석 보고서’에서 삼성전자 공장의 ‘제조 사이클 타임’이 연구 대상에 속해 있던 다른 29개 생산 공장들 가운데 최악의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제조 사이클 타임’이란 공장에서 원자재가 투입되어 여러 공정을 거쳐 완성품에 이르는 총 시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공장의 생산성을 측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로 이용된다. 이 시간이 짧을수록 물건을 완성하는 기간이 짧아 소비자가 요구하는 상품을 신속하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책 211쪽
놀라운 일이다! 천하의 삼성전자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다니. 쉽게 이야기해, 가장 생산성이 높은 공장에서 한 달이면 만들어 낼 물건을 삼성전자는 두 달 걸려서 만들었던 셈이다. 기업들이 보유한 공장이나 기계가 단기에 고정되어 있다고 보면, 결국 기업들의 생산성은 이 기계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다른 회사에 비해 동일 기간에 생산량이 절반밖에 안 된다면 결국 수익성도 절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호황에는 이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세계 반도체 시장의 규모가 줄어드는 심각한 불황에 생산성이 낮은 기업들은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 물론 당시 삼성전자 경영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도체 업계, 특히 공정기술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1996년 1월, 한 깡마른 중년의 미국인이 삼성전자 기흥 공장에 들어선다. (중략) 회의실에 도착한 이 신사는 배석한 삼성전자의 연구진과 경영진에게 놀라운 분석 결과를 하나 보여주었다. 바로 삼성전자 경쟁사들의 공장 생산 재고 현황이었다. (중략)
삼성전자 측은 여러 분석 결과 중 ‘삼성전자의 생산 재고 물량이 필요 없는 곳에 모여 있고, 이는 간단히 말해 모든 직원들이 너무 열심히 일해 생긴 결과다’라는 대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 216~217쪽
그런데 왜 삼성전자 생산 라인은 그토록 많은 생산재고를 가지고 있었을까?
(삼성전자가 초빙한 공정기술 전문가) 리치먼 MIT 대학 교수는 생산라인에서 재고가 적절한 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공장 생산라인에서 재고가 많이 필요한 곳이 있는 반면 많은 재고가 필요 없는 곳도 있다. (중략)
그렇다면 어떤 공정에 얼마만큼의 생산 재고가 필요한 것일까? 리치먼 교수는 전체 공정에서 가장 생산성이 떨어지는 공정을 ‘병목 공정’이라고 불렀다. (중략) 전체 공장의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병목 공정이 쉴새 없이 작업할 수 있도록 적절한 생산 재고를 유지해야 한다.
병목 공정이 아닌 곳에서 기계 고장으로 병목 현상이 벌어졌을 때에는 다른 공정들은 최소한의 생산 재고만 유지하고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책 220쪽
재미있는 이야기다. 일단 병목 공정 이야기는 금방 이해된다. 전체 반도체 주요 공정에서 8번째에 해당하는 Photo(lithography) 공정이 병목 공정이라고 가정해보자. Photo(lithography) 공정이 다른 데 비해 생산성이 압도적으로 낮다면, 이 부분을 어떻게든 도와주는 게 최선이다. 다른 공정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이 공정에서 막혀 버리면 공장 전체가 스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8번 공정 앞에는 재고를 최대한 쌓고 인력도 많이 배치해서 열심히 가동률을 올리는 한편, 이후 공정에는 재고를 많이 가져갈 이유가 전혀 없다. 8번에서 나오는 물량을 생산성 높은 후반 공정에서 곧장 소화가 가능할 테니까.
두 번째 해결책도 흥미롭다. 8번 공정(=병목공정)이 아닌 다른 곳, 예를 들어 11번 화학기상증착(CVD) 공정에서 기계 고장 등으로 생산성이 떨어진 경우에는 다른 공정에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당연하다. 명절 연휴에 경부고속도로가 꽉 막혔는데, 인터체인지를 통해 차들이 계속 들어가봐야 경부고속도로의 정체는 더 심해질 뿐이다. 경부고속도로가 막혔을 때에는 국도로 우회하거나, 혹은 아예 방송을 통해 ‘차량 진입을 자제’할 것을 권하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결국 각 공정단계의 생산성을 감안하지 않고 무작정 열심히 일하기만 해서는 공장전체의 가동률 및 생산 시간은 단축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각 공정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한들, 병목공정에 걸리는 순간 공장 전체의 생산성을 오히려 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이후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리치먼 교수의 조언을 적극 반영한 결과, 삼성전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새로운 시스템 운영으로 1996년 이후 삼성전자의 제조 사이클 타임은 업계 최단 시간을 경신했다. 업계는 삼성전자와 같은 대규모 공장이 단시간에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마치 코끼리가 요가 하는 것 같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성공의 중심에는 리치먼 교수가 있었지만, 리치먼의 조언을 이해하고 과감하게 과학적인 경영방식을 도입한 삼성전자 경영진의 결단도 큰 역할을 했다. (중략) 리치먼 교수의 운영 시스템이 가시적인 효과를 보이자,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와 리치먼 교수가 맺은 1년의 컨설팅 계약은 연장되었다.
리치먼 교수는 이 기간 동안 과학적인 기계운영 방식, 기계 설비 계획 등 제조 시스템 전반에 관해 조언하고 또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이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리치먼 교수는 2001년 에델만 상을 수상해 경영공학의 이론을 산업현장에 적용한 성공적 사례로 학계에서 인정 받았다. -책 222~223쪽
치열한 전쟁이 날마다 벌어지는 각 산업의 선두주자들은 손쉽게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중반까지는 덩치만 큰 비효율적인 기업이었지만, 기존 운영의 선입견을 과감히 버리고 과학적 운영을 선택하는 ‘혁신적 기업’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특히 리치먼 교수의 조언은 기존의 선입견과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점에서 수용하는 데 많은 심리적 장벽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기업가든 거액을 투입한 설비가 작업하지 않고 쉬는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병목공정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에는 무작정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삼성전자의 성공 비결이었던 셈이다.
물론 앞으로 중국이 ‘반도체굴기’에 성공해, 삼성전자 등 한국기업들이 DRAM 시장을 장악했던 것을 ‘옛 이야기’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성전자에 혁신의 마인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면, 새로운 도전에 절대 무기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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