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한민국 경제의 기틀을 일군 기업들은 창업 1~2세대를 지나 3~4세대에 이르고 있지만 최근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서 가족 승계는 더 이상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카리스마 넘치는 ‘오너경영인’ 체제에 거부감이 커지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담당 업종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한 국민적 요구도 늘고 있다. 사업에도 인사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전문경영인이며 그 자리는 뭇 직장인들의 꿈이다. ‘비즈한국’은 2018년 연중 기획으로 각 업종별 전문경영인 최고경영자(CEO)의 위상과 역할을 조명하며 한국 기업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삼성이나 LG와 같은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는 것을 두고 흔히 군대에 비유해 ‘별을 단다’고 표현한다. 보통 임원은 20년 이상 근속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증명하고 조직의 성과를 이끌어냈음을 의미한다. 임원이라는 훈장은 이에 대한 보상이다.
무수한 임원 중에서도 기업이나 특정 사업 분야를 모두 아우르고 책임지는 최고경영자는 지난 성과에 대한 보상만으로 될 수 없는 자리다. 물론 그간 성과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판단이 내려지겠지만, 앞으로 조직이 필요한 부분에서 가장 뛰어난 실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기대 받는 자리다. 요즘 연공서열을 무시한 발탁 인사가 크게 늘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동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IM) 사장과 황정환 LG전자 커뮤니케이션(MC) 사업본부 부사장의 가장 큰 공통점이기도 하다. 두 사람 모두 발탁 인사를 통해 동기들을 제치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조직을 책임지는 리더가 됐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기술에 밝으면서도 우수한 관리 능력과 추진력을 동시에 겸비했다는 평가다.
# 체급 차이는 있지만, 행적은 닮은꼴
사실 두 CEO를 라이벌로 보기에는 체급 차이가 좀 있다.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은 2016년부터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을 총괄하는 무선사업부장을 맡아 이끌었다. 지난해 말 신종균 부회장이 경영 2선으로 물러남에 따라 오는 3월부터 삼성전자 공동 대표이사가 될 예정이다.
고 사장이 무선사업부에 합류한 시점은 2006년. 이듬해인 2007년 신종균 부회장이 개발관리팀장에서 실장으로 승진하면서, 팀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2007년 아이폰 출시 후 자극을 받은 삼성전자가 시행착오 끝에 2010년 갤럭시S를 내놓을 때까지 신 부회장과 함께 손발을 맞췄다. 공교롭게도 2007년은 ‘애니콜 신화’로 유명한 이기태 부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삼성 휴대폰 사업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황정환 부사장은 지난해 말에야 MC 사업본부장으로 발탁돼 2월 스페인에서 열리는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18에서 데뷔를 앞두고 있다. 직급도 이번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지금까지 줄곧 TV 사업부문을 맡아왔기 때문에 스마트폰 사업에 대한 경험도 상대적으로 적다는 평가다.
황 부사장은 전무 시절 기자들의 질문에 시원시원하게 답변해주는 임원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가 몸담은 TV는 스마트폰과 달리 삼성전자와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는 분야다. 기술을 두고 설전이 벌어질 때마다 핵심을 짚는 ‘돌직구’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2015년 LG전자의 WOLED 방식을 두고 4K 인정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경쟁사(삼성전자) 대표의 발언을 직접 겨냥해 “TV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고 사장은 성균관대학교 산업공학과 80학번, 황 부사장은 고려대학교 전기공학과 84학번이다. 나이도 1961년생인 고 사장이 네 살 더 많다. 언뜻 보면 옆머리가 희끗한 황 부사장이 더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 고 사장 역시 상당한 백발이며 꾸준히 염색을 한다는 후문이다.
# 듣는 리더십 vs 묻는 리더십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은 평소 현업 부서와의 소통을 즐기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문제 해결에 앞서 다양한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직원들과의 격의 없는 토론을 즐기고, 판단도 정확하고 빠르게 내린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갤럭시S 출시부터 지금까지 생산 공정부터 유통, 품질 관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해결사 역할을 해냈지만, 그 중에서도 고 사장이 세간에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시기로 ‘갤럭시노트7 배터리 발화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고 사장은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대국민 사과와 함께 전량 리콜이라는 파격적인 수습책을 내놨다.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담당 기자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당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고 사장은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기자들의 공격적인 질문부터 배터리 및 제조공정과 관련된 기술적인 질문까지 전부 받아냈다. 조 단위의 막대한 비용이 발생했지만, 사태 직후 출시한 갤럭시S8의 누적 판매량이 전작 보다 15% 증가하면서 최악의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황 부사장도 소통을 즐기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접근 방식은 좀 차이가 있다. 어떤 해결해야 할 사안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고 꼼꼼하게 살피기로 정평이 나있다. 이공계 특유의 집요함으로도 읽힌다. 특히 ‘개발자와의 밥상’이라는 이름으로 팀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불러 함께 식사를 자주 즐기는 것으로 전해진다. 식사를 하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진짜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벌써부터 ‘리틀 조성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황 부사장은 전문 분야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꼼꼼하게 관리하고, 모르는 분야는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면 죽도록 힘들지만, 결과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는 평이다.
현업에서 일하는 한 LG전자 직원은 “앞으로 LG전자가 더 잘 되기 위해서는 황 부사장 같은 분들이 더 많아져야한다”면서도 “가능하면 함께 일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 처지는 다르지만…올해는 새로운 도전의 해
이렇듯 나이나 경험 면에서 약간 차이는 있지만 고동진 사장과 황정환 부사장 모두 이공계 출신의 순혈 엔지니어 출신으로 어떤 동기와 비교해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하지만 올해는 두 사람 모두에게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의 해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017년 11월 신종균 부회장을 포함 삼성전자 공동대표 3인이 경영일선에서 한꺼번에 물러남에 따라, 고 사장은 사업부문장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이라는 중책을 떠안게 됐다. 병환과 재판 등으로 인해 오너 일가의 공백이 장기화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부담이 적잖은 자리다. 해를 거듭할수록 스마트폰 수익성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폴더블’, ‘5G’ 등 새로운 도전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고 사장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황 부사장은 지난 수년간 국내 전자업계에서 가장 ‘극한직업’으로 통한 LG전자 MC 사업본부장을 맡은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자 시련이다. 수익성을 논하기에 앞서 11분기 연속 적자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미 스마트폰 시장이 성숙기를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 애플은 도저히 자리를 비켜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급형 시장은 이미 중국 기업들에게 점령당한 상황.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황 부사장이 과연 OLED TV 신화의 저력을 다시 발휘할 수 있을까.
봉성창 기자
bong@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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