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당신을 통해 나를 본다.” 서로를 마주한 두 남자. 이들을 표현할 다른 말이 있을까. 다른 삶을 살아온, 평생 만날 일 없던 두 남자에게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진다. 두 남자를 잇는 한 남자, 영화 ‘1급기밀’에서 군 1급 기밀을 폭로한 주인공 박대익 중령이다.
배우 김상경이 작품 속 박 중령 역을 맡았다. 그의 옆에 선 남자는 박 중령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계룡대 군납비리를 폭로한 김영수 전 해군소령이다. 박대익과 박대익, 다르지만 같은 두 남자가 만났다.
배우 김상경과 김영수 전 소령은 닮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180cm가 넘는 큰 키는 물론, 소문난 ‘입담꾼’이란 점도 비슷하다. 김상경은 ‘김줌마’라는 별명이 있다. 촬영 현장에서 농담도 많이 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유쾌한 현장을 만드는 역할로 잘 알려져 있다. 인터뷰 과정에서도 그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김 전 소령은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방권익연구소를 개소해 공익제보자들을 돕고 있다. 이미 공익제보를 했던 사람들은 물론, 제보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을 하다 보니 금방 ‘말’이 늘었다고 한다. 두 입담꾼이 만나 진행된 인터뷰인 만큼, 예정됐던 시간을 훌쩍 넘어 이어졌다.
# 박대익, 박대익을 만나다
“힘없는 정의,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명쾌한 해답을 찾기 어려운 영화 ‘1급기밀’ 속 대사에 두 남자는 나름의 답을 찾았다. 박대익 중령이 된 배우 김상경은 스크린 속에서, 김영수 전 소령은 현실세계에서다.
김영수 전 소령은 2006년 2월 계룡대 군수처 근무지원과장으로 부임한 이후 부임 이전(2003~2005년) 구매 및 계약 자료 일체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비리 사실을 포착했다. 군 비품 구매 과정에서 경쟁 입찰로 처리해야 하는 건을 특정 업체와 지속적으로 수의계약을 체결하거나, 적정가격보다 비싸게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비리 규모만 9억 4000만여 원에 달했다.
김 전 소령은 비리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정식 내부 절차를 통해 이를 알렸지만 별다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아내가 협박을 받는 등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 건 3년 뒤인 2009년, 김 전 소령이 제복을 입고 MBC ‘PD수첩’에 직접 출연해 군 내부 비리를 폭로 하고 나서였다. 그동안 “증거가 없다”던 국방부는 보도 이후 재조사에 착수해 비리를 확인했고, 31명에 달하는 관련자들은 모조리 형사 처벌을 받았다.
배우 김상경은 김 전 소령이 겪은 일을 그대로 영화에 옮겼다. 감시와 위협뿐만 아니라, 인사보복으로 인한 일명 ‘책상빼기’ 탓에 서서 업무를 보고 일반 사병과 함께 책상을 함께 썼던 일, 딸이 학교에서 배신자라는 말을 들었던 일 등 실제 김 전 소령이 겪은 에피소드가 영화에 등장한다.
김상경은 “세 가지 각각 다른 방산비리 사건이 영화에 혼합돼 있다. 사건 당사자들을 만나봤지만, 이 가운데 김 전 소령의 말투와 동작은 물론 당시 느꼈던 감정을 많이 참고했다”며 “내부고발로 내가, 내 가족이 위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었을까에 대해서도 집중했다. PD수첩 출연 전후 사진 속 김 전 소령의 달라진 표정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김상경이 연기한 박대익 중령의 얼굴도 비리 확인 전과 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
영화가 방산비리라는 민감한 이슈를 다루고 있고, 정치색을 띄고 있다는 우려에 대해 두 사람은 똑같이 “전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김 전 소령은 “비리를 폭로한 것 자체만으로 내부에서 ‘좌파’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오히려 나는 그 반대다. 보수적으로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라며 “방위산업비리는 정치도 이념과도 관계없다. 국가 안보와 소중한 장병들의 생명이 걸려있는 일이다. 전쟁에서 싸우다 순직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에서처럼 방산비리가 원인으로 불거진 부실 사고로 목숨을 잃는 건 군인에게 치욕스러운 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상경은 “지난 정부 시절 시나리오를 받았다. 당시 정부도, 그 전 정부도 방산비리를 강조했기 때문에 상당히 친정부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정부에서도 국방부에서도 지원을 많이 받을 거란 기대도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표정을 바꾸며 “시나리오의 첫 인상은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구조적으로 모든 연령층이 볼 수 있게 잘 구성이 되어 있었다. 시나리오 완성도와 함께 국내 최초로 방산비리를 다뤘다는 게 플러스요인이 됐다”며 “방산비리는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 아들, 친척, 이웃의 일이 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그 말도 안되는 일로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게 바로 잡아야 한다. 비리를 해결하는 데 정치색을 구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시선과 환경에 대해서도 김상경과 김영수 전 소령은 같은 말을 했다. 김상경이 김 전 소령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또 다시 내부고발을 하겠느냐”고 묻자, 김 전 소령은 잠시 말을 멈춘 뒤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번 더 생각을 해볼 것 같다”며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한 대가가 너무 컸다. 상처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김상경은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와 비교해 영화 제작 과정에서 사건과 김 전 소령이 겪은 일을 모두 알게 된 이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며 “만약 내가 김 전 소령이라고 한다면, 지금으로선 배우 김상경으로 볼 때 자신이 없다. 내부고발이 ‘배신’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인정하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영화 ‘1급 기밀’을 유작으로 남긴 고 홍기선 감독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홍 감독은 영화 촬영을 모두 끝내고 며칠 뒤인 2016년 12월 1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최종편집은 이은 감독이 맡았다.
김 전 소령은 “정확히 8년 전인 2010년 1월에 처음 홍 감독을 만났다.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처음엔 내부고발자와 딸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를 구상했다가 취재를 이어간 뒤, 방향을 틀어 지금의 ‘1급 기밀’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시나리오 작업만 6년이 걸렸다”며 “방산비리와 관련된 사회고발 영화로 알려지다 보니 투자는 물론, 촬영 장소 협조까지 쉬운 게 없었다. 감독님이 없었다면 세상에 이 이야기가 다시 알려질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경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오신 감독님 모습을 보고 ‘쌀집 아저씨’ 같다는 생각을 했다”며 “영화 찍는 내내 행복해 하셨다. 홍기선 감독님의 생각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게 많은 분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생전 인터뷰에서 “의미 있는 것이란 곧 고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역할은 우선 현실을 알리고 기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본주의라는 사회가 인간을 개인화시키고, 경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더욱 더 악화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며, 영화는 바로 그러한 희망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영화를 안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거나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상경과 김영수 전 소령도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무거운 소재를 담고 있지만 이웃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계기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희망이 전해졌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 ‘1급기밀’은 2002년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외압설, 2009년 군납문제를 폭로한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김상경, 김옥빈, 최무성, 최귀화 등이 출연한다. 2018년 1월 24일 개봉한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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