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사실 난 칵테일을 맛있게 마셔본 적이 없어.” 바에 앉자마자, ‘알중’ 친구 박 아무개 씨가 불길하게 중얼거렸다.
박 씨로 말하자면, 자기소개서를 쓰라고 하면 ‘와인과 맥주를 좋아하고 즐겨 마신다’는 문장을 꼭 넣을 것만 같은 인물이다. 우리끼리 ‘알중’이라 부르는 것이 자학적인 은어이긴 하나, 결단코 절대 병리적인 알코올 중독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하여 일상생활에 전혀 모자람 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박 씨이지만, 아무튼 퇴근하면 술을 마신다. 어디 가서 술 좋아하는 걸로 빠지지 않는 애주가라는 데까지는 진실이다.
게다가 요리를 업으로 한다는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술한 편견이나 갖고 있다니. 어떤 바에서 어떤 칵테일을 마셔왔기에 맛이 없다고 하는지,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칵테일의 세계만은 제대로 보여주고 말겠다는 승부욕이 타오른다. 더불어 바 사용법도.
바는, 아시다시피 위스키 등 다양한 서양 증류주와 칵테일을 판매하는 곳이다. 2013년경부터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며 ‘바 문화’를 형성하는 요즘 의미의 바는 향과 맛을 음미하는 법을 안내한다. 미식가들이 한 끼 식사에서도 ‘미식’을 추구하듯 애주가들은 바에서 술을 앞에 놓고 본인 취향을 알아낸다. 바는 그저 술집이라기보다 맛을 감별하고 탐구하는 장소다. 개인의 취향에 맞춰 ‘알코올 미각’을 발달시키는 곳인 셈이다.
특히 칵테일은 요리의 세계만큼이나 무한대의 맛을 내며, 바텐더의 창의력과 기술에 따라 별세계를 보기도 하는 음료다. 하지만 요리사와 달리,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의 맛과 향을 창조해내는 바텐더들의 창조성은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세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바로 저 박 씨처럼.
나 역시 용한 바를 만나 칵테일에 맛을 들였다. 홍대 앞, 세상에서 가장 정신없는 클럽 골목 안쪽에 간판도 없이 블라인드를 드리우고 영업하는 ‘디스틸(d.still)’이다. 바 문화가 생기기도 전에 영업을 시작한 선구자다. 이제는 국내외 명성도 자자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편한 곳이라 종종 간다.
칵테일을 주문하기 앞서 해야 하는 일은 내 취향을 바텐더에게 최대한 이해시키는 일이다. 메뉴판보다 바텐더가 더 정확한데, 같은 칵테일이라도 취향에 맞춰 미세하게 맛을 조정해주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박 씨는 수줍었던지 “저는 신맛 좋아해요”라고만 툭 말해버렸다. 역시나 아주 시고 씁쓸한 칵테일이 나왔다. 쩔쩔매는 박 씨를 보니 고소하다. 편견에 대한 복수다. “쓴 건 좋아하지 않고, 달고 신 칵테일을 마시고 싶다고 해봐. 자세히 얘기해야 해.” 예정된 실패를 일부러 경험하게 한 후 얄밉게 가르쳐줬다. 좋아하는 음식, 특히 디저트를 예로 들면 이해를 돕기가 매우 쉽다.
바텐더의 추천은 ‘더 라스트 워드(the last word)’. 새콤하고 달콤한 가운데 매력적인 허브 향을 가진 칵테일이다. “허브 향도 좋아해요. 크림도 좋아하고요”라고 한 마디를 더 보태니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민트향이 물씬 나는 클래식 칵테일 ‘그래스호퍼(grasshopper)’도 콕 집어 주문할 수 있었다.
두 칵테일을 마시자, 원래 크지 않은 박 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칵테일 개안’의 순간이다. 이후로 박 씨는 ‘모나코 피즈(monaco fizz)’, ‘민트 줄렙(mint julep)’, ‘엘더플라워 피즈(elderflower fizz)’를 쭉쭉 마시며 새로운 알코올 세계의 향락에 물들어갔다. 잔마다 다르게 변주되는 단맛, 신맛, 온갖 허브의 향과 엘더플라워의 찝찔한 향이 펼쳐내는 알코올 미식의 장이라니.
여기까지 취향을 안내해줬으니 일단은 됐다. 알코올 미각을 깨친 박 씨는 앞으로 늦은 귀갓길에 홀로 바에 들러 바텐더의 창의력이 묻어난 칵테일을 선택할 줄 알게 될 것이고, 클래식 칵테일도 바텐더에 따라 얼마나 섬세한 스펙트럼으로 차이를 내는지를 알아챌 수 있게 될 것이다. 야호, 박 씨가 좋아할 수 있는 술이 하나 더 늘었다!
다음 잔은 더 이상 박 씨 교육용이 아닌, 비로소 나를 위한 칵테일이다. 그야말로 “늘 마시던 걸로”. 진에 탄산수와 라임즙이 잔뜩 들어가고, 거기에 라임 껍질을 가니시로 곁들여 씁쓸한 맛과 향이 마무리를 쳐주는 ‘진 리키(gin rickey)’다. 시원하고 통쾌하게 콸콸 들이켜기 좋은 내 취향의 칵테일! 한입 맛본 박 씨는? 쓰고 안 달다며 물론 질색했다. 너와 내가 다르지만 함께 마실 수 있어, 아름다운 밤이었다.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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