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겨울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도 마음도 움츠러든다. 이파리 무성했던 풀꽃도 모두 시들고 꺾였고 낙엽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바람에 쏠려 다닌다. 앙상한 빈 가지에 걸린 낮달이 창백해 보이는 12월의 풍경이다.
하지만 이토록 차갑고 건조한 바람을 기다리는 야생초가 있다. 냇가나 습지에 핫도그 같은 열매를 매달고 있는 부들이 그러하다. 여름 거쳐 가을 내내 익힌 씨앗 하나하나를 멀리멀리 날려 보낼 날을 기다리는 부들이 건조한 찬바람에 드디어 씨앗 통을 폭죽처럼 터뜨렸다.
자연의 수많은 생명체는 각기 나름대로 여건에 순응하며 살아나는 지혜를 터득하고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견디고 이겨내며 터득한 생존술인 셈이다. 주어진 자연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는 이미 우리 기억과 시야에서 사라진 멸종된 개체들이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의 습한 장소에는 그 나름대로 식물이 살고, 메마르고 건조한 사막과 바위틈에서는 그곳에 적합한 생명체가 자리를 잡고 자란다. 자연생태계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생명체가 삶을 이어가려면 살아왔던 그 환경이 지속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계절은 계절다워야 한다.
겨울은 차갑고 바람이 불어야 한다. 자연생태계가 건강하고 원활하게 순환하기 위한 기본 조건인 셈이다. 낙엽 지고 황량한 벌판에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야만 핫도그 같은 부들의 열매이삭[果樹]이 터지고 그 안의 수많은 씨앗 알갱이가 미지의 세계를 찾아 훨훨 멀리 날아갈 수 있다.
부들은 이른 봄 쌀쌀한 바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초록빛 싹을 내밀고 태양이 달궈지는 초여름이면 꽃이삭을 피워 올린다. 녹색의 암꽃 위에 황색의 수꽃이 피고 나서 꽃가루받이가 끝나면 녹색의 암꽃은 핫도그와 같은 갈색의 단단한 열매로 익어간다. 여름철 무더운 열기와 가을 햇살에 잘 숙성된 부들의 열매이삭은 차갑고 건조한 겨울바람에 씨앗 통을 터뜨린다. 목화솜 같은 하얀 갓털에 씨앗 알갱이를 하나씩 매달아 멀리멀리 흩날려 보낸다.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축포와 이별을 아쉬워하는 슬픈 몸짓이 겹치는 상황이다.
부들 씨앗이 한창 날리는 겨울, 살포시 내린 눈이 부들 열매이삭에 소복이 쌓였다. 풍비박산(風飛雹散)하던 알갱이 씨앗도 잠시 비상을 멈추고 조용히 침잠의 시간을 갖는다. 이른 봄부터 세밑 섣달까지 의존해 오던 꽃대를 막상 떠나려 하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가 보다. 잘 키우고 숙성시켜 새 삶터를 찾아 떠나보내는 어미 마음과 잘 자라 홀로 새 세상을 찾아 떠나는 어린 마음, 이제 할 일을 마치고 사그라져 가는 한 세대의 마무리와 갖은 풍파를 헤집고 새 생명체로 태어나려는 다음 세대의 시작에는 결실의 기쁨과 작별의 아픔이 마주친다.
씨앗을 떠나보낸 빈 이삭 쭉정이는 찬바람 눈 속에서 밤새 사각대며 몸 닳아 갈 것이다. 몸 닳으며 사각대는 빈 이삭과 마른 줄기의 슬픈 신음은 기나긴 겨울, 빈 하늘을 내닫는 북풍한설 따라 더욱 크게 울리리라. 다가오는 새봄의 따스한 햇살 아래 새움 돋아나는 소리가 대신할 때까지 부들의 마른 줄기와 이삭은 닳고 닳아 사라져 갈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유한한 생명체의 한살이를 명증(明證)하듯이.
부들은 전국적으로 늪이나 습지, 호수에 주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은 6~7월에 노란색으로 피고 단성화이며 원기둥꼴의 꽃이삭에 달린다. 위에는 수꽃 이삭, 밑에는 암꽃 이삭이 달리며 잎은 얇고 납작한 형태로 길게 자라며 부드럽고 매우 질기다. 이름은 잎이 부드러워 부들부들하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잎이 바람에 부들부들 떤다고 해서 부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핫도그 비슷한 모양의 열매이삭은 길이 7~10cm로서 긴 타원형이며 적갈색이다. 요즘 조성하는 도시공원 호수에 관상용으로 많이 심고 있으며 최근에는 꽃꽂이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고 있어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꽃가루는 약재로 쓰인다.
풍비박산(風飛雹散) 부들 씨앗
여리고 무른 얄따란 풀잎 사이로
부들부들 떨며 피워 올린 초록 꽃대궁,
가을 지나 탱탱 영글자
핫도그를 닮은 폭죽(爆竹) 대롱이 되었다.
산천에 초록이 시들해지고
눈비 내리는 세밑 섣달이 되어
차갑고 마른 바람 기승부릴 제
밤하늘 폭죽처럼 씨앗 통 터뜨린다.
천둥 치는 장마와 따가운 햇살 아래
고이 기른 한해의 축복과
신천지로 내보내는 아픈 작별이다.
풍비박산(風飛雹散) 부들 씨앗,
바람처럼 우박처럼 사방으로 날아간다.
패(敗)한 것도 아니요, 도망도 아니다.
하얀 갓털 둥둥 타고 더 멀리 더 넓게
새 터전, 새 희망 찾아 떠나는 길이다.
찬바람에 사각대는 몸 닳는 소리,
끊이지 않는 밤샘 신음은,
슬픈 이별의 기쁜 함성 되어
빈 하늘을 내 닫는 찬바람에 묻혀간다.
유한한 생의 마지막은 곱고도 서글프다.
박대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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