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은행권이 장기 보유주식 매각 시점을 두고 고심이 깊다. 내년 새 금융상품 회계기준 도입(IFRS9)을 앞두고 있어서다. 새 기준은 기존보다 까다롭고, 주식을 매각해서 얻는 이익도 당기순이익으로 반영하지 못한다. 은행권은 최근 연내 주식을 매각할 것이란 예상을 엎고 내년으로 미뤘지만 셈법이 복잡해 여전히 저울질은 계속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IFRS9은 국제회계기준(IFRS)의 새로운 기준서다. 은행, 보험, 카드, 캐피털사 등 금융권에 적용된다. 세계적인 경제교류로 기업의 회계처리에 통일된 기준이 필요해지면서 새롭게 마련됐다. 2018년 1월 1일부터 국내 도입된다.
은행권은 새 기준 도입을 앞두고 고심이 깊다. IFRS9의 핵심 내용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해 예상되는 손실까지 추산, 미리 충당금(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한다는 점이다. 올해까지 적용되는 기준(IAS39)은 1년 동안의 손실만 계산해 대손충당금을 쌓아왔다. 내년부터 손실의 인식 범위와 규모가 크게 확대돼 더 많은 돈을 미리 쌓아둬야 한다는 얘기다. 금융연구원은 IFRS9 도입으로 내년 은행권 대손충당금이 8조 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올해 추정치 5조 7000억 원보다 2조 3000억 원(40.3%) 많다.
은행권이 보유주식을 두고 고민하는 이유는 주식의 위험가중치가 기존보다 3배 늘기 때문이다. 내년부터 글로벌 은행자본 규제 기준인 바젤Ⅲ까지 강화돼 보유주식 위험가중치는 기존 100%에서 300%로 올라 건전성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고 대손충당금만 늘어난다.
더욱이 IFRS9은 주식을 매각해서 얻는 이익을 당기순이익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자본만 늘어나게 된다. 올해까지는 은행이 보유한 주식을 매각하면 회계상 당기순이익으로 인식할 수 있다. 시중은행 리스크담당 관계자는 “기준이 강화되면서 은행들이 당기순이익을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수단 하나가 사라진 것”이라며 “주식을 계속 들고 있을지, 팔아야 할지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부실기업 구조조정 관련 채권단으로 출자전환 등에 참여하며 기업 주식을 대규모로 보유해왔다. 대부분 경영참여 목적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금융감독원에 공시된 시중은행 반기사업 보고서를 보면, 올해 6월 말 기준 신한금융은 SK네트웍스(2.75%) 비자카드(0.05%), 하나금융은 SK하이닉스(0.70%) 대한전선(5.20%), 우리은행은 금호타이어(14.15%) 대한전선(3.67%), IBK기업은행은 KT&G(6.93%) 등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KB금융은 주택도시보증공사(8.48%)와 SK(2.50%) 포스코(1.80%)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들 주식 가치는 최대 3조 원에 달한다.
은행권에선 올해 은행들이 IFRS9 도입을 앞두고 보유주식을 매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해왔다. 올해가 주식을 매도해 당기순이익을 끌어올릴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실제 상반기 신한금융은 비자카드 지분 800억 원어치를 매각했다. KB금융은 3분기에 현대시멘트 주식 410억 원, 하나금융은 SK하이닉스와 한일시멘트 주식 250억 원어치를 매각했다. 매각이익은 모두 순이익에 포함돼 올해 3분기 은행권의 ‘사상 최대 실적’을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이는 일부 사례일 뿐, 대부분 은행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수출입은행이 대표적이다. 현재 수은은 KAI 지분 2572만 주(26.4%)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건전성을 끌어올리려면 KAI 주식을 매각해야 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당국과 수은은 KAI 주식 매각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KAI 수사가 개인비리 수준으로 마무리되는 모습이라 수은 입장에선 회계 상 손실이 크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KAI는 분식회계 의혹으로 금감원의 특별감리를 받고 있으며 연내 분식회계 혐의에 대한 제재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KAI 주가는 분식회계 의혹이 불거진 8월 3만 5750원에서 12월 15일 현재 4만 6850원으로 1만 원가량 올랐지만, 금감원의 감리 결과 분식회계 혐의가 밝혀지면 또 다시 주가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은은 그만큼 회계상 손실을 처리해야 한다.
여기에 KAI는 3분기 실적에서 매출이 전년 대비 40.8%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마이너스(-) 910억 원이다.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의 납품이 지연되고 체계결빙 등으로 인한 손실이 한꺼번에 반영된 결과다.
올해 상반기부터 은행권은 블록딜(시간 외 대량매매) 방식 등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고 적절한 매각시점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대부분 지분 매각을 철회했다. ‘쏠쏠한’ 배당수익에 일단 내년으로 매각 검토를 미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IBK기업은행은 올해 KT&G 지분(6.93%)을 매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5년 이후 실적 완화로 자본 여력이 생긴 데다 주식 취득에 따른 배당수입이 지난해 말 기준 3518억 원을 기록해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내년부터 KT&G 주식의 위험가중치가 318%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업은행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며 “12월 15일 기준 KT&G 주가는 12만 원으로, 지분가치는 1조 원에 달한다. 추후 배당 수입을 생각하면 주식(KT&G)을 계속 보유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KEB하나은행도 SK하이닉스 지분 매각을 내년으로 넘겼다. 당초 하나은행은 연말까지 SK하이닉스 지분을 매각하기로 하고 내부적으로 시기를 조율해왔다. 실제 올해 2분기와 3분기 중 SK하이닉스의 지분을 장내매도 방식으로 꾸준히 매각했다. 하지만 증권업계에서 올해 SK하이닉스의 실적이 사상 최고를 거두고 내년까지 반도체 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실적 개선이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자, 매각 시기를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다만 SK하이닉스는 주가변동이 심하고 내년 하반기 삼성전자 등 글로벌 생산업체들이 SK하이닉스의 주력상품인 DRAM(디램) 신규 라인양산을 예고하고 있다”며 “하나은행의 주식 매도 시기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KB금융도 내부적으로 SK와 포스코 주식 매각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오다 최근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은행권에선 ‘일부 은행들이 올해 3분기에만 설립 이후 최대 실적을 올리는 등 올해 대규모 순익을 기록하면서 일회성 이익을 서둘러 챙기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대형 금융지주 관계자는 “올해 주식 매각으로 이익을 더 낼 순 있지만, 반대로 내년엔 이익이 감소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며 “이익으로 잡히지 않더라도 무리하게 올해 주식을 매각하지 않고 내년으로 미루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주식 매각에 대한 고민은 당장 내년부터 더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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