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야행’이라는 일본 소설이 있어요. 10년 전 영어회화 학원을 같이 다니던 동료들이 10년 만에 다시 모여 ‘구라마 진화제’라는 마을 축제를 보러 갑니다. 10년 전 ‘구라마 진화제’를 보기 위해 모였을 때는 하세가와라는 청년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하세가와의 소식은 오리무중입니다. 스스로 가출한 건지, 변을 당한 건지 알 수 없어요. 다섯 명의 친구들이 모여, 지난 10년간 겪은 일 중 신기한 이야기를 하나씩 하는데,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 사람이 사라지는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교토의 천재작가’라는 모리미 도미히코가 쓴 기담집 ‘야행’을 읽으면서, 저는 ‘일본에서는 사람이 실종되는 경우가 이렇게 많은가?’ 싶었어요. 하나의 판타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설정이 현실에서도 빈번한 일이라야 하거든요. ‘맞아! 나도 저런 비슷한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 하고요.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우연히 ‘인간증발’이라는 책 소개를 만납니다. 프랑스 작가들이 쓴 르포인데요, 부제가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입니다. 저자인 레나 모제는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일본인 아내를 둔 프랑스 남자 기(Guy)를 만납니다. 이런저런 얘기 중 친구가 그래요. 일본에는 매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가출해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매년 10만 명의 일본인들이 실종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중 경찰에 신고되는 실종자가 8만 5000명이다. 일시적인 가출인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증발’이기도 하다.’
인구 1억 2800명의 나라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매년 사라진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프랑스 작가는 일본 땅을 찾습니다. 그 미스터리한 현상의 이면을 추적해요. 기담에나 나올 법한 무서운 결말을 상상하게 되지만, 현실은 무섭기보다 슬픕니다. 빚, 실직, 낙방, 이혼, 그리고 수치심이 ‘인간증발’의 원인이에요.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가족과의 인연을 지우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뒤에는 잘사는 부자 나라 일본의 슬프고 비참한 현실이 있습니다.
어떻게 프랑스인 저널리스트 부부가 일본의 실종 현상을 책으로 쓰게 되었을까요? 일본 사람들은 정작 이 문제에 관심도 없어요. 사회의 부끄러운 치부라 여겨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실종을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 않아요. 집안 문제를 가지고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부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학 시험에 낙방한 아들이 사라집니다. 아내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빚을 진 가장이 사라집니다. 가족에게 수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혼한 딸이 사라집니다. 폐를 좀 끼치며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여중생 살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경찰에서 초기 실종 신고에 안이하게 대응했다는 지적이 있었지요. 저는 그 사건을 보고, 여중생 가출이 흔한 일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입시 지옥 탓에 아이들이 부모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면, 놀란 부모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지요. 며칠이 지나면 친구 집이나 찜질방을 전전하며 지내던 딸이 머쓱한 얼굴로 돌아옵니다. 여중생 아이들의 가출이 빈번한 탓에 실종 신고에 대한 대응이 굼떴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먼저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진짜 위험에 처한 아이와 단순 가출한 청소년을 구분하는 일이 쉬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결국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일에 우선하니까요.
일본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수만 명의 실종, 그걸 외국인의 시선으로 파헤치는 책, ‘인간증발’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문제를 조금 낯선 시각으로 들여다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민식 MBC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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