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아홉’은 찜찜한 숫자다. ‘아홉수에는 결혼이나 이사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청년이 나이 스물아홉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의 암묵적인 연령 상한선을 앞두고 있어서다. 여기 세 명의 아홉수 청년이 있다. 지금도 꿈을 좇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고급 취미 언제까지 할 거냐”
‘안개가 핀 것 같아 얼굴 위로 뿌옇게 / 난 숨어, 내 두려움과 악몽 가지고.’
‘피○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A 씨의 곡 ‘얼굴’의 한 구절이다. 가사에서 A 씨의 고민이 드러난다. 그는 음악 활동 마지노선을 서른 살까지로 정해 놨다. 아홉수인 지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한층 깊어진다.
“나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요. 그런데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어요. 한순간 암울해지죠. 현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으니까요. 부모님 걱정이 가장 커요. 저를 믿고 응원해주는 유일한 분들이죠. 그 기대에 빨리 보답하고 싶어 흔들릴 때도 많아요. 이런 모습들이 제 곡에 많이 반영되곤 해요.”
그는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써둔 가사를 정리하고 곡을 만들었다. 앨범을 발매할 돈은 없었기 때문에 완성곡을 들고 홍대 앞으로 나가 매주 거리공연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잠시라도 서서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면 행복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르바이트하고 돌아와 음악작업을 하거나 거리공연을 해요. 월세와 공과금, 식비 등 움직이는 매 순간이 돈이라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일 수는 없어요. 지금 사는 방도 돈을 아끼려고 직접 페인트를 칠하고 벽지를 붙였어요. 최근에는 앨범을 만들었는데요, 모아둔 돈을 다 써서 삼각김밥만 먹고 있어요.”
자신감이 생기자 동료들과 공연을 하기로 했다. 아마추어에게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이 공연을 하기 위해선 돈을 모아 공연장을 빌리고 장비도 직접 챙겨올 수밖에 없다. 한 번에 수백만 원이 들어간다.
“지인에게 고급 취미 언제까지 할 거냐는 말도 들었어요. 오래 했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요. 충격이었죠. 결혼은 언제 하느냐고 물어보는 건 약과에요.”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고맙다며 기자에게 자신의 앨범을 건넸다. 마지막 한 모금 커피를 마신 후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문을 나섰다.
#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내게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B 씨는 래퍼의 꿈을 접고 회사원이 됐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나이가 늘수록 두려움은 커져갔다. “서른 살 내로 성공할 수 있겠지”란 생각을 하며 살았다. 아홉수가 되던 해. 음악 하나로 먹고 살겠다던 B 씨에게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시작됐다.
“아홉수가 무섭긴 하더라고요. 취직하려 해도 나이 때문에 탈락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게 무서웠어요. 다른 길을 찾으려 할 때 그것마저도 성공하지 못할까봐서요. 나이 한 살 느는 순간 평생 무직으로 살 것만 같았어요.”
B 씨는 급하게 준비해 취업에 성공했다. 영어 공부를 하고, 곧 대리가 되는 친구에게 자기소개서 첨삭을 받았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과 복지는 꿈도 못 꾸지만, 회사를 나올 수는 없었다. 막막했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10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실업률 8.6%, 체감실업률 27.1%를 기록했다.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세요. 정년도 다가오고 아들이 안정적인 삶을 살길 바라셨거든요. 회사를 나올 수는 없어요. 미래의 막막함이 제 발목을 붙잡고 있는 느낌이에요. 친구들 모임에 가서 회사 얘기를 하면 조용히 있었는데, 이제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죠.”
B 씨의 반지하 방 구석에는 마이크와 키보드가 보였다. 책상 위로는 ‘TEPS’와 ‘홈레코딩’ 도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실 아직도 꿈을 놓지 못하고 있어요. 퇴근 후 작곡을 하고, 밥 먹으면서 가사도 쓰고요. 서른 살이 되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겠죠.”
B 씨는 밝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정류장까지 기자를 배웅하고 나서야 만족한 듯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 어머니의 암 투병, 대학 자퇴 그리고 무급 생활
C 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타지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5년 동안 병간호를 했다. 학교 출석이 힘들어져 대학을 그만뒀다. 공무원 시험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게 힘들었어요.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자퇴하고, 친구들은 다 입대해 혼자 생활했죠. 꿈이랄 것도 없었어요. 하루하루 버틸 뿐이었죠.”
어머니 완치 판정 후 뒤늦게 군대를 다녀왔다. 전역하니 어느새 아홉수. C 씨는 운전병 경력을 살려 자동차 관련 일을 하기로 했다. 여러 군데 지원을 해 래핑, 광택, 선팅 등 자동차 관련 사업장에 겨우 들어갔다. 어깨너머로 업무를 배우지만 교육이란 이름으로 무급 생활을 하고 있다.
“작은 고시원에서 사는데 월세를 내려면 돈을 벌어야겠죠. 그래서 야간, 주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어요. 다행히 밥은 같이 먹어서 점심 값은 절약할 수 있어요. 지금 제 상태로 다른 회사를 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해요. 여기서 열심히 배워야죠.”
C 씨는 인터뷰 내내 좁은 방으로 초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문을 나오자 그는 나중에 꼭 밥 한번 먹자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세 명의 청년은 모두 아홉수에 민감해했다. 마지노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 최대 취업 커뮤니티에는 “서른 살에도 희망이 있을까요?”란 글이 자주 보인다. 29세에서 30세. 고작 1년의 세월 동안 능력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SNS에 “30세에도 취업할 수 있었던 비결”이란 제목의 글이 보인다.
김종용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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