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결혼하기 전, 저는 여의도 MBC 사옥으로 출퇴근하기 편한 마포에서 살았습니다. 새로 생기는 일산 제작센터나 상암 신사옥으로 다니기에도 마포는 교통 여건이 좋았어요.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자, 아내는 일하는 동안 아이를 친정 엄마에게 맡겨야 하니 처가가 있는 분당으로 이사하자고 하더군요.
MBC 드라마국이 일산 제작센터로 옮겼을 때, 분당에서 일산까지 출퇴근 하느라 하루 3시간 이상을 길에서 보냈습니다. 드라마 피디로 일하느라 수면 시간도 부족한데 말이지요. 보다 못한 아내가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마련해 줬지만, 저는 내심 서운했어요.
아내에게는 저보다 아이들이 우선이더라고요. 회사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와, 부럽다. 부인이 오피스텔도 얻어주고.” 하더군요. 옆에서 듣던 선배는 한 술 더 뜹니다. “좋겠다. 야동도 마음껏 보고.” 이 양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기가 생긴 저자, (망할 동남아 콘돔!) 임신 중절 수술 날짜를 예약하고, 또 취소하고, 고민 끝에 아기를 낳습니다. 라디오 PD의 일상도 바쁜데, 별안간 엄마가 되고, 아이를 봐주시는 시어머니와 신경전을 펼치고, 그 불만을 놓고 남편과 대립하는 며느리가 됩니다. 어느 날 훔쳐 본 남편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 엄마는 시어머니. 나를 살게 한 내 어머니를 아내는 싫어한다.’
아기를 생각하면 시어머니에게 양보하고, 남편의 입장도 보살피고, 직장에서 일 욕심도 줄이고, 그렇게 살아야하는데, 그게 왜 이리 힘들까요? 인생에서 늘 가고 싶은 방향으로 직진으로만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 출산과 육아라는 이름의 언덕을 만납니다. 이제 돌아가기도 하고, 고개도 넘어야 하고, 수렁도 건너야 해요. 그 과정에서 일하는 엄마의 고민이 자꾸자꾸 고개를 듭니다.
‘나는 지금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걸까?’ ‘워킹맘으로 일하면서 회사 생활은 잘 하고 있는 걸까?’
라디오 피디로 일하는 저자는 힙합 음악 선곡을 할 때 신경을 많이 쓴답니다. 장르 특성상 욕설이 많이 나오기에 방송심의에 걸릴까봐 곡을 세심하게 거르는데, 문제는 그러다보면 일하는 재미가 사라진답니다. 신나고 흥겨운 좋은 음악을 선택하는 게 목적이지, 방송 심의에 걸리지 않는 게 일하는 목적은 아니잖아요?
프로그램을 만드는 목적은 방송 사고를 내지 않는 게 아닙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욕을 먹지 않는 게 아니죠. 삶의 목적이 실수하지 않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심의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만족하는 것, 글을 쓰면서 욕을 먹을까에만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 실수할까 걱정하느라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 그런 게 진짜 피해야 하는 모습일 겁니다(책 243쪽).
여성들이 공감할 이야기가 많지만, 저는 특히 남성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요. 아내를 만난 지 20년이 되어 가는데요, 한 여자가 아내가 되는 것보다 아내가 엄마가 되는 일이 더 경이로웠어요. 그 과정에서 저는 때로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여자가 아내가 되는 것은 내 사람이 되는 과정이고, 아내가 엄마가 되는 것은 내 사람을 아이들에게 빼앗기는 과정이거든요.
전자는 뿌듯했지만, 후자는 왠지 서운했어요. 내 아이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사람에게 나는 내 욕심만 부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책을 읽다가 부끄러워집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읽으며, 남편으로서 또 아빠로서 저 자신 조금 더 성숙해지기를 희망합니다.
김민식 MBC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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