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현대중공업, 효성중공업, LS산전이 원자력발전소 변압기 입찰담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와 경찰의 조사를 받는 가운데, 최근 새로운 담합 정황이 드러났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발주한 원자력발전소 변압기 구매 사업을 두고 LS산전과 효성중공업이 담합한 사건으로, 이 과정에서 효성중공업 관계자가 LS산전 관계자를 사칭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효성중공업, 현대중공업, LS산전의 입찰담합 의혹은 공정위와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동시에 조사 중이다. 지난 9월 5일 ‘비즈한국’의 보도([단독] 효성·현대중·LS, 원전 변압기 입찰담합 의혹) 이후 각각 조사에 착수했다. 최근 검찰이 강제수사로 전환한 효성그룹 비자금 조성 혐의와 공정위가 지난해 5월부터 조사를 벌여오던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와는 별도로 진행 중이다.
이들 세 업체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 한수원이 발주한 ‘원자력발전소 변압기 구매사업’에서 미리 낙찰될 업체와 가격 등을 합의했거나 수의계약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수차례 입찰을 포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업체들이 담합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업 규모는 최소 50억 원이다.
당초 알려진 바와 달리 공정거래위원회는 ‘비즈한국’ 보도 이후 추가로 접수된 공익신고 내용을 토대로 지난 10월 세 업체 조사를 마쳤고 최근 보강 조사를 진행 중이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9월부터 내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입찰담합을 뒷받침할 새로운 증거들을 추가 입수했고 현재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 공정위와 사법 당국은 담합을 ‘시장경제의 적’으로 규정하고 다른 불공정행위보다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 사전에 낙찰자 합의, 경쟁업체 사칭 등 의혹
공정위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최근 담합 근거가 되는 또 다른 정황이 새롭게 발견됐다. 2013년 초 한수원이 발주한 ‘고리2호기 비상전원공급용 승압변압기 구매 사업’이다. 변압기란 교류전압을 높이거나 낮추는 장치로, 수력·화력·원자력 등 각종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공장과 가정에 전달될 때 발생하는 손실을 줄이는 데 사용되는 핵심 부품이다.
한수원 전자상거래시스템 ‘K-Pro’를 통해 확인한 결과, 사업 규모는 3억 7088만 원이었다. 이 사업에서 변압기 납품이 차질 없이 이뤄지면 7억 8900만 원 규모의 한울 1, 2호기 ‘비상전원공급용변압기 구매 사업’에도 납품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두 사업을 합치면 총 사업 규모는 10억 원이 넘는다.
공정위와 경찰 조사 내용과 당시 사업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LS산전과 효성중공업 관계자들은 2013년 1월 초부터 낙찰자와 입찰금액을 미리 합의하고 2월 5~6일께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효성중공업을 낙찰자로 결정한 뒤 입찰 금액은 효성중공업 3억 3000만 원, LS산전 3억 5000만여 원으로 각각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실제 2013년 3월 25일 효성중공업이 이 사업에 최종 낙찰됐다.
실무자들은 합의 내용대로 진행했지만 ‘변수’가 생겼다. 앞서의 고리2호기 변압기 구매 사업에는 낙찰 필수 요건으로 ‘기술적격심사’가 포함돼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 실무자 간에 마찰이 있었던 것이다. 기술적격심사는 설계대로 제품을 만들 수 있는지, 성능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절차다.
문제는 이 기술적격심사를 받기 위한 자료 준비에 상당한 시간과 인력이 소요된다는 점이었다. 기술자료와 변압기 설계도면 등을 포함해 A4용지 기준 40~50쪽 분량의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데다, 고리2호기에 납품할 변압기는 새로 설계해야 하는 부품이라 기존 변압기 데이터를 사용할 수 없었다. LS산전 측은 자신들이 낙찰 받지 않을 사업에 들여야 하는 시간과 인력이 과하다고 판단, 효성중공업 측에 자료를 내기 어렵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리2호기 변압기 구매사업은 수의계약이 아닌 경쟁방식으로 진행되는 탓에 LS산전 측이 이 사업의 필수 요건인 기술적격심사를 받지 않으면 사업은 유찰된다. 효성중공업은 LS산전의 기술자료와 설계도를 대신 만들어 한수원에 제출했다. 자신들이 납품할 변압기에서 일부 데이터를 고치는 방식이었다. 국가로 상대로 한 계약에 허위문서를 만들어 제출했다는 얘기다.
각 업체별로 2013년 2월 27일 한수원 본사(당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에서 열리는 기술적격심사에 참석해 자료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효성중공업 관계자가 LS산전 실무자를 ‘사칭’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업 실무자와 설계 담당자 한 명씩 참석해야했는데, 효성중공업 창원 공장에서 만든 기술자료를 LS산전 공장 설계 관계자가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효성중공업 영업 실무자의 요청으로 공장 측이 설계 관계자 두 명을 보내 한 명은 효성중공업 기술자료를, 다른 한 명은 LS산전 기술자료를 설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LS산전 영업 실무자는 LS 기술 자료를 설명할 효성중공업 설계 담당자에게 LS산전 직원으로 행세하도록 공장 설계 담당자의 명함까지 전달했다.
# 한수원 ‘묵인’ 의혹도 제기돼
이러한 담합 정황 의혹은 한수원으로도 번진다. 한수원 측이 담합과 사칭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내용이다. 효성중공업 측이 LS산전의 기술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효성 마크가 새겨진 문서 포맷에 LS산전 기술내용을 적어 한수원에 제출한 것이다. 공정위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 사업에 참여했던 일부 관계자들은 “당시 한수원 담당자로부터 LS산전 기술자료에 효성 마크가 찍혀있으니 새로 만들어 제출하라”는 취지의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수원이 묵인한 이유에 대해서는 고리2호기 사업이 정부 차원의 ‘기획 사업’이라 시간에 쫓겼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일부 관계자들은 조사 과정에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와 관련, 원전이 침수되면서 전자계통이 모두 손상돼 ‘블랙아웃’이 발생했던 점을 이유로 사고 이후 국내에선 비상시에 전원을 원활이 공급할 수 있도록 새 변압기를 설치하기로 결정됐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실제 고리2호기 등에 납품된 앞서의 변압기는 ‘비상전원공급용’이다.
원자력발전소의 대규모 사업인 만큼 통상 연간 사업 계획이 미리 공지되지만, 고리2호기와 앞서의 한울1, 2호기 변압기 구매 사업은 급하게 진행됐다는 내용도 있다. 유찰되면 사업 진행에 차질이 빚어지는 만큼, 한수원 측에서도 눈감아 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할 근거 중 일부로, 영업 실무자와 공장 담당자가 나눈 문자메시지와 카드거래 내역서 등이 제출 됐다. 문자메시지에는 기술적격심사 전날인 2013년 2월 26일 효성중공업 창원공장 설계 관계자가 영업 실무자와 나눈 대화가 적혀있다. “내일 회의 공부하고 인수인계 잘 받아서 와라” “내일 반드시 한 명 더 보내달라고 팀장에게 말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문자메시지를 보면, 효성중공업 측 설계 담당자 가운데 한 명은 2월 27일 한수원에서 열리는 회의 내용도 모르고 참석했다.
카드거래 내역서는 2013년 2월 27일 한수원 본사 인근의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에 사용한 내용이다. 이 사업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한수원 담당자와 LS산전, 효성중공업 관계자가 오후 1시에 모여 함께 식사했고, 한수원 회의실에서 2시부터 3시까지 LS산전이 기술자료를 설명하고 효성이 3시부터 4시 20분까지 설명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이에 대해 ‘비즈한국’은 효성중공업에 앞서의 LS산전을 대리해 기술자료를 설명한 공장 설계자의 출장기록 등과 함께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효성 측은 “조사 중이라 구체적 확인은 어렵다”면서도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일부 관계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LS산전 관계자도 “고리2호기 입찰에 참여한 건 맞지만,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내용이라 답변하기 어렵다. 현재 조사에 성실히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수원은 입찰담합 건에 대해 별도로 감사실이 인지해 별도로 확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1월 15일부터 24일 현재까지 전화와 문자메시지 등으로 수차례 확인을 요청했지만 한수원 측은 “포항 지진과 후속 대책 등으로 확인할 여력이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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