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격투기 시합 전에는 선수들의 몸무게가 규정에 맞는지 확인하는 계체량 절차가 있다. 계체량을 마친 후 양 선수가 마주보고 사진을 찍는다. 이때 선수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신경전을 한다.
지난 여름 세기의 대결이 있었다. 현 WBC 챔피언인 메이웨더와 현 UFC 챔피언인 맥그리거의 싸움이었다. 계체량 후 두 선수가 마주섰을 때 카메라 섬광이 끊이지를 않았다. 맥그리거가 상당한 도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메이웨더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연신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반면 메이웨더는 덤덤하게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본 시합은 메이웨더의 승리였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이웨더의 승리를 점쳤다. 특히 계체량에서 사납게 메이웨더를 위협하던 맥그리거의 모습에서 오히려 약한 모습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우리말과도 같다. 실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괜히 부산을 떨면 평정심을 잃어서 될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양 당사자가 맞서는 재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재판에 임하는 자세와 관련해 나름대로 세 가지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상대방 대리인(변호사, 검사)에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 것 △말과 글에는 예의를 담을 것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불필요한 언행은 삼갈 것.
나 역시 시행착오가 있었다. 변호사 자격을 얻고 재판에 처음 나가던 해에는 열의가 앞서서 법정에서 상대방 대리인에게 직접 질문을 하거나 발언을 했던 적도 있다. 원래 각 당사자들은 자신의 주장은 판사를 향해서만 하고 상대방에게 요청할 것이 있더라도 판사를 통해야 한다. 재판의 정숙과 효율을 위해 응당 그래야 한다. 변호사가 법정에 나와서까지 서로 얼굴을 붉히며 마주 대화한다면 법원의 중재역할이 허무해진다. 그리고 변호사가 물색없이 군다면 당사자들끼리 삿대질하며 다투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엇보다 변호사가 감정을 다스려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현명한 결론에 다다르려면 차분하고 치밀해야 한다. 어느 재판에서는 내가 상대방 당사자의 약점을 진술했더니 재판 마친 후 복도에서 그 당사자가 나를 쫓아와서 왜 그렇게 말했냐고 따져들었다. 그 옆에는 그의 변호사도 있었다. 나는 그 변호사가 그를 제지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 변호사는 한술 더 떠서 “아니 그 증거는 또 어디서 찾았습니까?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는 게 아닌가. 더 마주할 이유가 없어서 나는 한마디 말없이 돌아 나왔다. 사무실에 앉아 가만히 생각할수록 점점 화가 났다. 당사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변호사는 대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는 마치 권투 시합이 끝났는데 링 아래에서 공격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변호사의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항의를 할까, 변호사회에 민원을 넣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어떤 결론을 내렸다. 그 후 그 상대방 변호사가 본인의 일정을 이유로 다음 재판 날짜를 좀 연기하고 싶은데 동의해줄 수 있느냐며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동의를 해주었다. 그리고 어투와 문장을 대단히 예의바르게 하여 그를 대했다.
다음 재판에서도 내가 먼저 웃으면서 목례를 하고 재판 후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나보다 연차가 훨씬 높은 변호사였으나 나의 행동을 통해 뭔가를 배우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만 글에는 더욱 날카로운 논리를 담고 증거는 더욱 풍요롭게 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또 한 번은 형사재판을 위해 법정 안에 대기 중이었는데, 내 앞 사건에서 어느 변호사가 증인신문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대한민국 검찰이 증거를 조작해서 되겠습니까?” 뜬금없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질문이 검사와 피해자를 공격하는 사변적인 내용이었고, 목소리 높이와 행동이 좀 과하게 느껴졌다. 방청석에 해당 피고인의 지인들 또는 회사직원들이 다수 앉아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재판동안 다들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다가 재판이 끝나자 우르르 몰려나갔기 때문이다. ‘아, 의뢰인이 좀 대단한 사람인가보다’라고 생각했다.
변호사는 의뢰인과 방청객들을 의식하여 그날 재판을 망쳤다. 판사를 설득하는 재판이 아니고 의뢰인을 위한 한편의 쇼 또는 씻김굿에 불과했다. 변호사에게 인신공격을 당한 검사는 그날 이후 이를 갈며 더할 나위 없이 열심히 그 사건에 집중했을 테니 그 변호사야말로 공익의 수호자인가 싶기도 하다. 하여 결국 의뢰인을 수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들이 위에서 소개한 안 좋은 사례들의 종합편이다. 그의 대리인(변호인)들은 헌법재판관들에게는 국회의 대리인이라고 모욕하고, 검사에게는 뇌물 받은 집단이라고 공격했다. 재판 직후 법정 밖 복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서 “추론과 상상에 의한 장편의 소설”이라고 형사재판 자체를 무시했다. 어떤 변호사는 법정 안에서 태극기를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법원에서 정의를 찾을 수 없다며 변호사들이 전원 사임했다고 하니 고객으로서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고3 때 건설현장 일용직 소위 ‘노가다’를 처음 나갔다. 며칠 뒤 반장 아저씨가 내게 와서 빗자루를 확 뺏더니 말했다. “너는 일을 하러 왔냐? 일하는 척을 하러왔냐?” 빗자루 질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 주변에 널려있는 쓰레기들을 가운데로 모으는 일에도 진심과 집중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날 이후 반장 아저씨의 질문은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공부를 할 때, 운동을 할 때, 특히 일을 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면피를 하거나 내 분을 풀려고 하고 있는지, 정말로 좋을 결과를 내려고 하는지를. 내용도 없이 요란하기만 한지, 군더더기 없이 목표로 향해가고 있는지를. 그래서 천의무봉(天衣無縫)은 될 수 없어도 인(仁)의 어진 마음으로 겉으로 예(禮)를 갖추어서 이기는 재판을 위한 최소한의 환경 정도는 갖추려고 노력 중이다.
류하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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