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년 넘게 끈 어떤 사업장의 민·형사 재판에서 모두 이겼다. 자랑이 아니라 허무함을 말하고 싶다. 소송은 전투다. 전투에서 이기면 좋았다가, 이어지는 다음 전투들을 슬픈 눈으로 보게 된다. 전투와 전쟁은 다르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는데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그림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해고된 일이 있었다. 하소연할 곳 없어 끙끙대던 그는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해 이겼다. 노동위원회 구제 절차에서 2심 격인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이겼다. 회사는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 사이 1년이 지났다. 노동자는 벌이도 없이 메말라 갔다. 행정소송 1, 2심에서도 노동자가 이겼다. 대법원에서도 노동자 승소를 확정했다. 해고 후 4년 만이다. 직장 동료들이 증인으로 많이도 출석했다. 회사 편을 들며 노동자를 거짓 증언으로 공격했다. 노동자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우울증을 앓았다.
변호사 비용은 또 어떤가. 1년 연봉이 나갔다. 노동자는 철저한 고독 속에 회사와 4년을 싸웠다.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런데 회사는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다. 행정소송이기 때문에 회사는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야 할 의무만이 발생하는데 이행강제금 몇 푼을 내면서 버티면 그만이다.
이런 경우 노동자는 ‘해고무효확인’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노동자는 ‘법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생각하며 황폐해진 내면과 어두워진 외모를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원망한다. 회사가 고통받는 일은 없다. 회사는 마음도 없고 몸도 없다. 모두의 책임은 무책임이기 때문에 인격이 소거된 회사가 존재할 뿐, 손해라고 해봐야 소송비용 푼돈을 회사 공금으로 지출했을 따름이다.
대신 회사는 직원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너희도 이렇게 될래?’ 약자는 재판에서 이겨도 지고, 져도 진다는 교훈을 전 직원에게 보여줬다. 누가 승자로 보이는가. 약자들의 소송은 정도의 차이가 있으되 양상이 비슷하다.
약자에겐 소송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법은 형식적으로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두드리는 보루다. 궁지에 몰렸을 때 번거롭더라도 소송을 포함한 일체의 법적 구제절차에 의지해야 한다. 이는 최소한에 불과하거나 겨우 시작일 수 있다.
전투에 이긴 자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고, 그 사람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사람이 똑같은 전투에 뛰어드는 형국을 반복하는 상황이 비루하다는 이야기다. 전투의 룰이 불공평하면 전투가 벌어지지 않게끔 법정 밖에서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변호사는 대신 전투를 치르거나 무기 자체가 되는 사람이다.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곁을 떠나지 않는 허무함은 늘 이유가 있다. 열쇠는 법정 밖에 더 많기 때문이다.
지난 해 어느 주말 구속영장실질심사 재판이 있었다. 구속 자체의 적법성을 다투는 재판이다. 그는 세월호 2주년 촛불집회 중 체포됐다. 석방 이유를 판사에게 설명했다. 서면을 보지 않고 판사와 눈을 맞추며 얘기하는 도중 울컥하는 느낌이 왔다.
그가 왜 며칠째 집에 안 들어오는지 모르는 홀어머니 생각 때문인지, 체포 과정에서 발을 접질려 불편해 보이는 그의 직업이 일용직 건설노동자라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또 다른 사람이 세월호 집회 중 연행됐다는 뉴스를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의뢰인은 다행히 당일 밤 석방됐다. 그 후에도 잡히고 석방되고 무죄가 선고되는 일이 반복됐다.
“희망 없는 세상을 떠도는 우리가 갈 곳은 어디인가-최초의 인류로부터.” 영화 ‘매드맥스’가 끝나고 암전된 화면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이솝 우화에는 ‘로도스 섬이라면 공중제비를 잘 돌 수 있을 텐데’라며 허풍을 부리는 자에게 이웃들이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고 한 이야기가 있다.
평화롭고 공정한 세상에서 살려면 내가 선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허무의 안개가 따뜻한 바람에 밀려나고, 내가 가야할 길들이 맑아진다.
류하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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