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래퍼 타블로는 잡지 ‘매거진 B’와의 인터뷰에서 “힙합은 젊음(youth)을 대표하는 문화”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 특유의 치기, 오만함, 무모함, 그리고 열정 등과 같은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음악이라는 의미일 텐데요.
힙합은 남성적인 음악이기도 합니다. 공격성, 자기 과시 등의 감성이 적극 드러나지요. 누군가에게 힙합이 불편한 이유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힙합의 역사가 길었음에도 여성 아티스트는 드뭅니다. ‘나이 있는’ ‘여성’에게 척박한 쇼 비즈니스. 그중에서도 가장 젊은 남성 위주로 움직인다고 알려져 있는 힙합계에는 여성 아티스트가 별로 없습니다. 유명 여성 래퍼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죠.
‘더 미스에듀케이션 오브 로린 힐(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은 가사를 보면 개인적인 음반입니다. 당대 유행하는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개인적 이야기를 다루었지요. 지나간 사랑인 와이클리프 진에 대한 씁쓸한 감정. 아이를 낳으면서 느낀 엄마로서의 각성. 음악계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 소수인종인 흑인으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고단함. 작은 일들에 대한 감사함. 로린 힐은 본인이 느꼈던 다양한 감정을 거침없이 풀어냈습니다.
직접 만든 이야기에 직접 쓴 가사를 붙였다는 건 그녀가 단독 예술가로 올라섰다는 걸 의미합니다. 특히 엄마라는 주제는 미국 팝 시장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는 주제였는데요. 이를 거침없이 풀어낸 로린 힐의 음악은 가장 젊은 음악인 힙합과 엇갈리는 듯 묘하게 어우러지며 새로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로린 힐의 ‘엑스 팩터(Ex-Factor)’.
‘엑스 팩터(Ex-Factor)’는 이 앨범의 가장 개인적인 음악입니다. 로린 힐이 다른 가수에게 주기 위해 썼던 음악인데요. 너무나도 개인적이라 본인이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와이클리프 진과의 격정적인 사랑과 이별 이후의 씁쓸한 감정을 과감하게 드러낸 곡입니다.
음악 자체도 소울풀한 사운드의 네오 소울, 알앤비입니다. 이 음악이 유행하면서 비로소 네오 소울이 팝 음악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라임, 드럼 프로그래밍 등 힙합의 문법을 활용해 리듬감을 만듭니다. 여기에 아날로그 소울 악기로 곡을 꾸며 대중적인 멜로디와 반주를 가미하지요. 가스펠 특유의 화성감으로 볼륨을 채웁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들으면 흔한 음악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운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겠지요.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 정도로 강력한 매력을 가진 음악이기도 하지요.
로린 힐의 ‘두 왑(Doo-Wop)’.
‘두 왑(Doo-Wop)’은 앨범 타이틀곡이라 할 수 있는 첫 싱글 곡입니다. 화려한 랩과 강렬한 코러스를 통해 노래와 랩을 넘나드는 로린 힐의 재능을 온전히 보여준 곡이죠. 남자에게 받은 상처를 모든 남자, 여자에게 대입해 재치 있게 쓴 가사는 사랑에 실패한 로린 힐의 개인적 감정을 담았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내용 또한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아티스트로 전성기에 오른 로린 힐을 보여준 음악입니다.
이 곡은 발표되자마자 빌보드 1위를 차지했습니다. 당시까지 역사상 열 번밖에 없던 일입니다. 솔로 데뷔한 신인 가수로는 최초였습니다. 시장이 크고, 속도가 느렸던 당시의 미국 음악 시장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이후 이 곡은 ‘최고의 여성 R&B 퍼포먼스 상’과 ‘올해의 R&B 노래’를 수상했습니다. 평단과 대중 모두를 잡은 셈입니다.
로린 힐의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즈 오프 오브 유(Can’t Take My Eyes Off Of You)’.
로린 힐의 사랑 노래가 모두 실패한 사랑만을 다룬 건 아니었습니다. 로한과의 행복한 생활을 이야기한 음악도 있었습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올드팝을 리메이크한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즈 오프 오브 유(Can’t Take My Eyes Off Of You)’가 대표적입니다.
히든 트랙 중 하나인 이 곡은 로린 힐의 절정의 창작력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알던 곡을 네오 소울, 알앤비로 절묘하게 재해석했습니다. 원곡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당대의 유행을 따랐지만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기획을 본인이 주도했을 정도로 당시의 로린 힐은 프로듀서로도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앨범을 발표한 후 로린 힐은 그래미 10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었습니다. 그중 5개를 석권했습니다. 받은 상 중 두 개는 본상이라 할 수 있는 ‘올해의 신인상’과 ‘올해의 앨범 상’이었습니다. 힙합 앨범으로는 최초로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앨범이기도 했습니다.
대중적인 성공은 더욱 대단했습니다. 첫 주부터 타이틀곡 ‘두 왑’으로 빌보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후 800만 장이 넘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지요. 로린 힐 또한 힙합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타임스’ 표지를 장식하는 등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기성세대가 힙합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 여성과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힙합 음악으로 음악계를 제패한 셈입니다.
로린 힐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로린 힐은 로한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엄마 역할을 하면서 쇼 비즈니스계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도 그런 음악계에 염증을 느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요. 그를 도왔던 프로듀싱 팀 뉴아크는 로린 힐이 자신들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크레딧에는 단독 작곡으로 표시한 점을 문제 삼아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이후 로린 힐은 MTV 라이브 앨범만 발표한 채 팝음악계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춥니다.
빛나는 시기는 길지 않았지만, 그의 앨범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힙합 앨범 중 하나로 회자됩니다. 그의 음악은 남성 위주 대중음악사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흑인 여성’,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팝음악에 다양성을 불어넣었습니다. 완성도 또한 훌륭해 2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즐겨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지금껏 살아남은 보석 같은 목소리, 로린 힐이었습니다.
김은우 아이엠스쿨 콘텐츠 디렉터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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