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개인형 퇴직연금(IRP) 시장을 두고 금융권 경쟁이 치열하다. 올해 가입 대상이 크게 확대돼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업계에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고 있다. 반면 수익률이 낮고 출혈 경쟁에 따른 ‘깡통계좌’ 논란까지 나오면서 퇴직연금으로서의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IRP는 근로자가 본인 명의 계좌를 만들어 퇴직이나 이직 시 받을 돈을 모아 두는 퇴직금 관리제도다. 만 55세 이후에 적립금을 일시금이나 연금으로 찾을 수 있다.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고, 이자소득세를 내지 않는 등 ‘절세 혜택’도 있다. 예금이나 적금, 펀드 등에 투자해 추가 수익금을 얻을 수도 있다.
IRP 시장은 최근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가입대상 기준이 확대되면서부터다. 그동안 IRP 가입은 일정 급여를 받는 일반 사기업 근로자로 한정됐지만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지난 7월 26일부터 공무원 등 4대 직역연금 가입자, 자영업자, 1년 미만 취업자까지 가입 대상이 크게 확대됐다.
금융권에선 추가 신규 가입 대상자를 약 73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더구나 IRP 계좌는 유지 기간이 길고 퇴직이나 인센티브를 수령할 때마다 목돈이 들어온다. IRP 시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불리며 금융권에서 경쟁이 치열해진 이유다.
가입 대상 확대 3개월이 지난 현재, 은행권이 시장 점유율을 압도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 소속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개인형 IRP 계좌개설 현황’을 보면,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기업 6개 시중은행이 확보한 IRP 계좌수는 총 214만 5466개를 기록했다. 증권업계가 18만 4575개로 그 뒤를 이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수익구조가 이자 이익으로 크게 기울어 있는 은행 입장에서 IRP는 수수료 수익을 얻을 수 있어 수익구조 개선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며 “은행별 실적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은행에서 개설된 계좌수가 많은 건 사실상 은행들이 사활을 걸고 영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다른 업계와 비교해 영업망이 넓어 상대적으로 가입자를 많이 모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은행 퇴직자 대부분이 가입한 점도 시장 점유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매년 은행권에선 3000~4000명의 퇴직자가 발생한다. 자신이 다니던 은행에서 IRP를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IRP 시장에서 ‘남은 파이’를 점령하기 위한 증권사의 경쟁도 은행권 못지않다. 증권업계는 가입자 대상 확대 초기 일부 이벤트를 진행했지만, 최근에는 대형 증권사를 중심으로 수수료 무료화를 선언하는 등 ‘출혈 경쟁’을 하고 있다.
삼성증권은 지난 7월 말부터 온·오프라인 전면 무료화를 내걸었고, 미래에셋대우와 한국투자증권도 9월부터 IRP 수수료 무료화를 실시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수료 무료화는 업계 트렌드처럼 자리 잡았다”며 “다른 증권사들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풀어야 할 숙제는 있다. 금융권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고객 모집에만 치중할 뿐 ‘깡통계좌’와 같은 부작용이나 수익률 저조 문제 해결에는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 가계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높은 특유의 환경을 고려해 IRP도 ‘맞춤형’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깡통계좌 논란은 업계의 치열한 경쟁 과정에서 발생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전체 IRP 계좌 가운데 0원인 계좌는 154만 884좌로 57%를 차지했다. 그동안 은행권 등에서 직원 성과에 연동해 가입자를 유치하면서 소비자 피해 우려 목소리가 높았다. 지난 7월 가입자 대상 확대 이후 금감원에서 불완전판매 등의 모니터링을 강화한 이유다.
IRP의 낮은 수익률은 퇴직연금으로서의 실효성과 직결된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연간 수익률은 1.58%로,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제 수익률은 0%에 가깝다. 연금을 수령할 때 5.5%의 연금소득세도 내야한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IRP 상품에는 원리금보장상품이 많은 편이다. IRP는 개인이 직접 다양한 상품을 선택하고 운용을 위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선택에 폭이 넓고 장기 상품이라 검토해야할 부분이 많은 단점도 있다”며 “일반적으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원리금보장상품이 주를 이뤄 수익률이 낮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최근 수익률 지적이 많이 나오면서 업계에선 IRP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별도의 포트폴리오와 상품을 마련을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수익률을 높이는 과정에서 주택연금만큼의 지급액은 보장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가구당 평균 자산액 3억 6187만 원 가운데 실물자산 비중은 2억 6788만 원(74%)이었는데, 이 가운데 부동산이 2억 5029억 원으로 93.4%를 기록했다. 국내 개인 자산 환경을 볼 때,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아 부동산을 사고 이를 연금화하는 게 IRP 등 퇴직연금 방식으로 연금화하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전·월세 시세나 주택가격 상승 등을 감안하면 연금보다 유리할 수는 있다”면서도 “개인의 선택이지만 안정적인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연금 취지를 고려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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