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MBC 총파업이 시작되고 한 달 동안, 지난 5년 MBC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많은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 ‘공범자들’을 보면, ‘PD 수첩’을 연출하다 스케이트장 관리로 발령이 난 피디며, 아나운서로서 드라마 세트장 견학 일을 담당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힘든 세월, 어떻게 버텼냐고 물어보는데요. 저는 책 덕분에 버텼어요.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연재하면서 책에서 찾은 귀한 글귀를 베끼며 시간을 보냈거든요. ‘책 먹는 법’(김이경, 유유)에서 이런 글을 봤어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와 함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다 26년이나 감옥 생활을 한 아흐메드 카스라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명 높은 로벤 섬에서 만델라와 18년을 복역한 ‘위대한 7인’ 중 한 명이기도 한데, 그는 감시의 눈을 피해 어렵게 구한 책과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옮겨 적으며 그 시간을 견뎠다고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는 ‘소박한 자유’를 지켜 냄으로써 ‘보다 큰 자유’에 대한 꿈을 간직할 수 있었다는 카스라다. 그가 베낀 수천 개의 글귀는 무자비한 폭력조차 무력하게 만든 ‘글’의 힘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책 먹는 법 105쪽
영화 ‘공범자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2012년 구속영장이 청구된 저는 이용마 기자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법원으로 갑니다. 당시 경찰서 유치장에 갔을 때, 제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이 책장이었어요. 유치장 책장에 수백 권의 책이 꽂혀 있는 걸 보며, 만약 MBC 파업을 이끌었다는 죄로 징역을 살게 된다면 감방에서 책이나 실컷 읽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무죄가 나와 풀려났고요. 그 후 저는 매일 책을 읽습니다. 지난 5년, 책이 없었다면 어떻게 버텼을까요?
‘책 먹는 법’을 쓴 김이경 선생님은 편집자로, 필자로, 독서 모임 선생으로 책과 관련된 일을 하며 책의 고수들을 만났습니다. 책으로만 알던 필자를 만날 때 얼마나 설레고, 한 해에 일이백 권씩 책을 읽는 다독가를 보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그런데 그 설렘과 반가움이 실망과 배신감으로 바뀐 적도 많았답니다. 존경하던 필자가 실제로는 교만하고 무례하여 그에게 시달리다 눈물을 쏟은 적도 있다고요. 작가 인터뷰에 이런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좋은 글을 쓴 사람은 심성도 좋은 사람’일 거라는 환상을 버리기가 쉽지 않아요. (웃음) 작가는 교만해야 글을 쓸 수 있어요. 글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술가라고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자아도취가 있어야 해요. 자기 예술을 하려면 내가 특별한 걸 한다는 마음이 있어야 뭐라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냥 공부를 하는 사람이죠. 교만이 동력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그 사람을 존경할 필요는 없다니까요.” -‘채널 YES’ 저자 인터뷰 중에서
글을 쓰면서 늘 고민합니다. ‘내가 뭐라고 아는 척을 할까?’ 모든 사람이 겸손하다면 글을 쓰는 이는 없고, 독서라는 취미도 존재하지 않겠지요. 책을 읽는 행위는 겸손한 행위입니다. 글 쓴 이에게 하나라도 배우겠다는 자세지요. 글을 쓰는 것은 오만한 일이고요. 내가 알게 된 것을 감히 알리겠다는 마음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대단한 사람이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면서 성장한다고 믿어요.
‘책 먹는 법’에는 ‘든든한 내면을 만드는 독서 레시피’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요. 삶의 재료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가장 알차게 보내는 방법이 독서고요. 저자가 오랜 시간을 들여 얻은 깨달음을 짧은 시간에 내 것으로 만드는 비법이지요. 지난 몇 년 읽은 수백 권의 책으로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더 단단해졌기를 희망합니다. 유배란, 싸움에 패한 자가 단순히 몸을 숨기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시간이니까요.
김민식 MBC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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