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국경제의 성취를 다룬 책 ‘한국경제사의 재해석’(김두얼, 2017년)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한 나라의 번영에 ‘운’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예를 들어 한국이 아시아의 동쪽 온대(및 냉대) 기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부양할 토지 생산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이는 당연히 다른 역사 경로를 유발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동쪽에 일본이 없고 태평양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면, 역시 한민족의 발전 방향은 완전히 달랐을지 모른다. 1853년 페리 해독이 일본 에도가 아니라 조선의 강화도를 봉쇄하고 개항을 강요하고, 또 직후 발생한 남북전쟁 덕분에 조선이 미래 외세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물론 매우 흥미로운 역사실험이지만, 이를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15~16세기 스페인의 역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행운이 벌어졌을 때, 경제와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종의 ‘모의실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세계 최고의 서양사학자 중에 한 사람인 카를로 M. .치폴라 교수의 책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16세기 스페인이 어떤 믿기 어려울 정도의 횡재를 만났는지 설명해준다(37쪽).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세계를 정복 초창기에 획득했던 금은 전적으로 강도와 노획, 약탈의 산물이었다. 모든 기생적인 활동이 그렇듯, 그런 활동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다. (중략) 희생자들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나면 도적들로서도 더 이상 할 일이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스페인인들이 정복지에서 막대한 금광, 특히 은광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런 치명적인 운명이 어김없이 그들에게도 닥쳤을 터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 스페인이 볼리비아에서 어마어마한 은광을 곧 발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42~43쪽).
은총의 해는 1545년이었다. 앞선 시기에 스페인들이 광산 탐석을 시작한 곳에서 남쪽으로 약 5000킬로미터 떨어진 남아메리카의 이곳은 이때만 해도 신과 인간 모두가 포기한 듯 보이는 해발 4000미터 높이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빈한하고 황량하며 음산한 진흙투성이의 땅이었고, 비천한 원주민 목동 하나가 외딴 곳에서 몇 마리의 라마를 치고 있었을 따름이다.
이곳은 포토시라고 불렸는데, 오늘날에는 볼리비아 공화국의 일부다. 이곳의 높은 산 정상에는 약 400미터 높이의 이상한 돌기처럼 생긴 작은 ‘구릉’이 솟아 있었다. 1545년 이 ‘구릉’에서 엄청난 양의 은이 발견되었다. (중략) 1545년 4월과 1562년 사이의 짧은 시기 동안 같은 곳에서 최소한 7개의 풍부한 광맥이 발견되었다.
인간이 살지 않는 황량한 산봉우리에서 거대한 은맥이 발견된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스페인의 행운은 이제 시작이었다(43~44쪽).
포토시 광맥의 발견은 스페인으로서 거대한 횡재였다. 이 대단한 발견의 결과는 이미 1548년에 은 생산이 전년에 비해 약 10배 증가했을 때 감지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또 다른 일련의 특별한 사건을 알리는 예고편이었을 뿐이다. 포토시 광맥이 발견된 지 채 1년도 안된 1546년 9월 8일에 스페인인과 원주민으로 이루어진 작은 탐험대가 멕시코시티 북쪽으로 220킬로 떨어진 사카테카스라는 곳을 발견했는데, 이곳에서도 극도로 풍부한 은맥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어마어마한 은맥이 발견된 것으로 스페인의 행운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더 순도 높은 은을 상대적으로 쉽게 추출해내는 방법이 발명되었다(44~45쪽).
사카테카스와 포토시는 16~17세기 스페인의 힘과 부의 주요 원천이 돼 주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준 일련의 횡재는 끝날 줄 몰랐다. (중략) 광산 작업의 수익성이 떨어지던 16세기 중반에, 정확히는 1540년에 베네치아에서 바노초 비링구초라는 기술자가 ‘열기술’이라는 논문을 냈다. 이 이탈리아인은 논문에서 수은을 이용해 광물에서 금속을 추출하는 새롭고도 대단히 효율적인 공법을 제시했다. (중략)
이 혁신은 스페인에 안성맞춤이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자국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알마덴이라는 곳에서 풍부한 수은광산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수은을 이용한 추출법은 비용이 절감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던 광맥까지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1588년 즈음에는 스스로를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부르며 자조한다(103쪽).
우리의 왕국들은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금과 은, 계속해서 유입되는 상당한 양의 재보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이 될 수 있었지만, 반면에 금과 은을 우리의 적인 다른 왕국으로 보내는 징검다리로 전락한 까닭에 가장 가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토록 어마어마한 행운이 연속해 쏟아졌음에도 스페인은 왜 부강한 나라가 되지 못했을까? 물론 스페인 왕실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국고를 낭비한 탓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만이 이 문제의 원인은 아니다(106쪽).
지금 경제 균형 상태에 있는 A, B, C의 세 나라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특정 시점에 A국에 통화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균형 상태가 깨졌다고 가정하자. 만일 문제의 나라가 그들의 생산 체제로는 유통 화폐량이 증가한 만큼 총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면, A국은 가격 상승을 겪으며 B, C 두 나라로 귀금속의 유출을 경험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B, C 두 나라로부터 A국으로의 수출이 증가할 것임에 틀림 없다.
스페인이 겪은 일이 이것이었다. 갑작스럽게 경제 전체의 유통 화폐량이 증가하니, 자연스럽게 돈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플레는 자국 제품보다 타국 제품에 대한 수요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으며, 특히 스페인이 산업생산 면에서 유럽 내 강한 경쟁력을 갖지 못한 것이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107쪽).
아메리카의 정착민들이 필요로 하는 필수품. 밀가루와 올리브유, 식초 등의 경우에는 스페인이 별 어려움 없이 공급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모직물과 구두, 양탄자, 가구, 견직물, 벨벳, 시계 등을 공급하는 문제에 당면에서 스페인 생산 체제는 완전히 취약성을 노출하고 말았다. 공급은 수요의 폭증을 결코 따라잡을 수준이 못 되었다.
1545년이 되면 스페인 산업이 카르타헤나와 포르토벨로 등 아메리카의 핵심 항구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6개월 이상의 기간을 두어야 했다. (중략) 그 결과, 가격이 뛰었고 스페인은 정착민들이 요구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외국에 의존해야 했다.
결국 행운이 아무리 지속된다고 한들, 그 나라가 이 행운을 소화할 능력이 없는 한 오히려 저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스페인의 행운에 견줄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네덜란드병’이 될 것이다. 북해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된 다음, 그 건실하던 나라 네덜란드가 급격히 쇠퇴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감당할 수 없는 행운은 결코 경제의 번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도 한때는 남해의 7광구에서 석유가 펑펑 쏟아지기를 기대한 적 있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7광구가 없는 것이 한국에 큰 복이 되었음을 말이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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