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김두얼 교수의 흥미로운 책 ‘한국경제사의 재해석’을 읽다 보면, 한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오랜 식민지 지배, 그리고 독립하자마자 발생한 전쟁으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되었음에도 식민지배국인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을 넘볼 정도로 발전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비관적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한국 경제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한다.
저렴한 인건비와 토지가격, 그리고 정부의 무제한에 가까운 지원 등으로 쌓아 올린 수출 경쟁력이 얼마나 유지 가능할까?
시간당 최저임금이 5000원대를 넘어서 곧 7000원대에 도달하고, 수도권 등 인구 밀집지역의 토지가격이 이미 웬만한 선진국 뺨칠 정도로 높아졌는데도 수출 경쟁력이 유지되느냐는 이야기다.
2017년 기준, 한국은 세계 최고 혁신 국가
그러나 이에 대해 잠깐 반론을 제기하자면, 한국만큼 혁신적인 국가, 다시 말해 경쟁력을 꾸준히 개선시킨 나라를 찾기 힘들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블룸버그가 2017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로 한국을 꼽은 것을 들 수 있다. 참고로 스웨덴이 세계 2위, 그리고 독일과 스위스가 각각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미국은 직전 해에 비해 한 단계 내려간 9위, 그리고 일본이 7위로 세 계단 내려갔다.
한국이 세계 1위의 혁신 국가로 지목된 이유는 생산성 수준이 아직 경쟁국에 비해 낮지만(32위), 대신 기술 투자(R&D)와 제조업의 부가가치 능력, 그리고 특허 출원 활동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은 것은 아직 소득 수준이 선두권 국가에 비해 쳐지기 때문이며, 이건 지금 같은 혁신이 지속되는 한 점차 격차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2008년만 해도 한국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은 12위에 불과했지만, 2014년에는 세계 7위로 도약한 데 이어 2016년에는 드디어 세계 6위로 발돋움했다.
물론 앞으로도 이 순위기가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러시아와 인도 멕시코 등 인구대국들이 언제든지 한국을 추격할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높아진다. 까마득하게 멀리 달려가는 선두주자를 후발주자들이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을까? 이미 브랜드 가치를 확고하게 세운 데다, 경제 전체가 매우 효율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선진국을 개발도상국이 어떻게 감히 추격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크림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어떻게 러시아군을 쳐부셨나?
이에 대해 역사학계의 태산북두, 윌리엄 맥닐 교수는 ‘전쟁의 세계사’를 통해, 이전의 범용 기술이 사장되고, 새로운 혁신이 시작될 때에는 후진성의 이점이 크게 부각된다고 한다. 여기서 ‘후진성의 이점’이란 선발주자에 비해 후발주자가 적극적으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1850년대 러시아와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맞서 싸운 크림전쟁이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308~309쪽).
이 거대한 괴물(러시아)과 맞서 승리한 것은 크림전쟁에 파견된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대단한 업적이었다. 두 나라 군대가 성공한 것은 보급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은 화약과 그 밖의 필수물자를 해군기지가 있는 세바스토폴 군항을 지키는 부대에 보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중략) 이에 비해 프랑스와 영국의 파견군은 바다를 통해 배로 보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보급물자를 입수할 수 있었다. (중략)
세바스토폴 공성전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벌어졌던 서부전선 전투의 소규모 예행연습과 같았다. 종횡으로 연결된 참호, 야전 축성, 대포의 일제 사격으로 탄막을 형성하는 것 등이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중략)
알마·빌라클라바·인키르만의 전투는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둔 코니히그레츠 전투(1866)의 예행연습이었다. 이 세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 보병은 새로 지급 받은 라이플소총이 워낙 성능이 좋았기 때문에 러시아 보병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보병은 구식 머스킷총(화승총의 일종으로 부싯돌을 장착해 사격하는 재래식 총으로, 숙련된 총사는 1분에 2발 내외 발사할 수 있었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두 총의 차이는 한 가지로 요약된다. 활강총인 머스킷총은 유효사거리가 180미터인 반면, 신식 라이플총은 약 900미터에 달했다는 점이다.
1850년대에 발명된 최신형 소총, 라이플이 세계 최강의 육군대국 러시아를 쳐부수는 결정적 무기로 작용했던 셈이다. 그런데 영국이 사용한 라이플 소총은 영국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었다(책 312~313쪽).
머스킷총을 만드는 데 맞춰져 있던 총기 제작의 낡은 관습과 방법으로는 신식 라이플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밀성에 쉽게 도달할 수 없었다. (영국군) 검사관들이 불량부품의 인수를 거부하며 이전보다 좁아진 오차 허용기준을 강요하려 하자,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크림 전쟁의 발발로 수요가 급증하자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긴 직인들은 작업을 거부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중략) 더 많은 총을 만들어내기는커녕 국가가 무기생산을 절실하게 요구하던 시기에 생산량이 오히려 감소해버렸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 안팎에서 분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관계 당국은 라이플 총 제조를 촉진하고 개선하기 위해 무언가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영국 울리치 조병창의 당국자들은 이미 하나의 대안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미국식 제조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미국식 시스템? 포드주의 생산방식의 원초를 발견하다!
그럼 미국식 시스템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윌리엄 맥닐 교수의 이야기를 조금 더 경청해보자(313쪽).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미합중국 조병창과 코네티컷강 유역의 민간 소화기 제조업자들이 1829~1850년에 걸쳐 ‘미국식 제조 시스템’을 개발해냈다. 이 방식의 요체는 자동 또는 반자동 선반을 사용하여 정해진 모양대로 부품을 깎아내는 것이었다.
이런 공작기계는 호환가능한 부품들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보다 덜 정확한 수작업으로 총을 만들 때처럼 섬세한 줄질이나 조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총을 조립할 수 있었다. 물론 선반기계는 비쌌고 또 재료의 낭비도 많았다. (중략) 그러나 대량의 총기가 필요한 경우에는 대량생산에 의한 규모의 경제 덕분에 이런 식의 자동식 생산이 충분히 채산이 많았다.
영국은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미국식 총기제조법을 알게 되었다. 이때 새뮤얼 콜트는 자기 회사의 리볼버 권총을 전시하고 부품의 호환성을 보여주었다. 그 자리에서 권총을 몇 정 분해하여 부품들을 뒤섞은 다음 집히는 대로 부품을 모아 다시 권총을 조립하더라도 제대로 발사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1910년 포드가 미시간주의 하이랜드 파크에 세운 새로운 공장에서 컨베이버 벨트에 기반을 둔 대량생산시스템(포디즘)을 시작하기 이전, 미국에는 이미 지속적인 혁신이 나타났던 셈이다. 한때 자신의 식민지였던 그리고 늘 후진적이라고 깔봤던 나라, 미국이 개발산 생산 시스템에 의지해야 했던 영국 조병창의 관계자들은 매우 괴로운 심정이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어떻게 이런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제도적 차이다. 미국은 직입조합(길드)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은 매우 희소하기에 미국의 기술자들과 사업가들은 아무런 장애 없이 ‘효율성’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수십 년 동안 단련된 직공의 내공에는 조금 못 미치더라도 대량생산을 통해 제품 가격을 낮추고, 더 나아가 수리를 편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적기에 무기를 공급해주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인은 기존의 기술(머스킷소총)이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가운데, 프랑스에서 개발된 혁신적인 라이플소총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에서 시장의 ‘장벽’이 사라진 것을 들 수 있다. 크림전쟁 당시 영국 병기창이 미국에 선반기계 및 라이플소총을 주문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314~315쪽).
자동화는 표준 규격의 라이플총을 제조하기 위해 미국산 기계를 수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울리치 조병창에서는 신식 탄환(후장용 라이플총을 위해 개발된 미니에 탄환)을 만들기 위해 발병된 신식 기계가 하루에 25만 발 토해내기 시작했다. (중략)
다른 유럽국가들도 기계를 사용하면 주문을 받자마자 곧 대량으로 소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70년경 러시아, 스페인, 오스만제국, 스웨덴, 덴마크, 이집트가 영국의 선례를 좇아 총기 제조를 위해 미국산 선반기계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총기 제작지인) 벨기에 리에주의 총기제작자들이 새로운 기계를 설립하여 미국산 기계를 사들였다. 영국의 국내 총기 생산이 크림 전쟁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1854년에 영국 정부가 리에주에 발주한 라이플 총 15만 정을 납품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럽의 총기시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장인적인 총기 제조 방법은 사라졌다. 정부의 조병창에 새로운 기계가 설치되자, 지난 수세기 동안 리에주를 중심으로 번영하던 국제적인 소화기 거래의 비중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 후진국들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선진국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성공을 가져왔던 ‘환경’이 변화하는 순간 언제든지 후발주자가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후발주자의 이점’은 한국에게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당장 중국이 조선이나 철강 등 주요 산업에서 한국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으며, 베트남이 스마트폰 등 한국 수출 기업들의 생산시설 이전 덕분에 흥기하는 게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이야 ‘혁신국가’로서 위치가 우뚝 선 만큼 한국의 경쟁력이 흔들릴 위험은 낮다. 그러나 만에 하나 방심하고 또 지속적으로 R&D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1850년 영국이 겪었던 일을 한국이 겪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잊지 말자.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김이수 부결' 기재부 날벼락, 예산‧세제안 빨간불 발만 동동
·
특혜에서 애물단지로 전락, 신동빈의 롯데면세점에 무슨 일이…
·
오바마 방문도 거절한 덴푸라 장인의 철학
·
[홍춘욱 경제팩트] 한국 산업화는 언제 시작되었나?
·
[홍춘욱 경제팩트] 한국의 산업화, 대외원조 덕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