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서울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 가운데 핵심으로 꼽히는 잠실5단지와 은마아파트의 표정이 극과 극이다. 두 곳은 기존 아파트를 철거한 뒤 최고 50층 높이의 새 단지를 세우는 안을 놓고 서울시와 줄다리기를 해왔는데, 은마아파트가 고배를 마신 반면 잠실5단지는 ‘사실상’ 성공했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 잠실역 사거리, 롯데월드타워 맞은편. 깨끗이 청소된 길과 보도블록이 이어졌다. 가지가 잘 정돈된 나무들을 따라 걷자 색이 바랜 붉은 담장이 나왔다. 담장 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단지 안은 깨끗했지만, 한눈에 봐도 낡았다. 덧칠한 페인트가 흐릿했고 군데군데 갈라진 모습도 보였다.
13일 ‘비즈한국’이 찾은 잠실주공5단지다. 40년 전인 1977년 말 준공된, 강남권의 대표 재건축 추진 단지다. 이곳은 최근 일주일간 강남권 재건축 시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잠실5단지 전용 76㎡ 호가는 16억 원으로, 1주일 새 1억 원 올랐다. 정부가 8·2 부동산 대책을 내놓은 뒤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재건축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달아오른 분위기는 주변 부동산중개업소에서 확인된다. 10년째 이곳에서 영업한 공인중개사는 “매물 있느냐는 문의 전화가 계속 들어온다. 최근 며칠은 전화 받느라 식사도 걸렀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와 20여 분 남짓 대화하는 과정에서도 문의 전화를 받느라 분주했다. 업소 유리벽에 붙는 매물 전단은 한 장도 붙어있지 않았다. 다른 중개업소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인중개사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 잠실5단지는 매물이 거의 없다. 급매물은 주인을 벌써 찾아갔고, 남은 매물은 집주인들이 서둘러 취소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9월 7일 서울시가 잠실5단지 재건축 계획안을 약 14년 만에 사실상 승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하루 앞서 열린 도시계획위원회에서 보류 결정을 내렸지만, 향후 논의과제가 단지 내부 교통처리계획 보완 등만 남아있어, 재건축은 승인된 것이나 다름없다.
잠실5단지는 강남 한강변 최고 높이 50층 재건축의 첫 주인공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이후 서울시에서 50층짜리 아파트를 허가한 것도 이 아파트가 처음이다. 서울시는 그동안 공동주택의 최고 층수를 35층으로 제한하면서, 초고층으로 올리려던 서울 재건축 아파트들의 계획을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얼핏 서울시의 ‘특혜’로도 보이지만 관계자들은 전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잠실5단지가 지역적 특수성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서울시의 ‘2030 서울플랜’을 보면, ‘3대 도심’(광화문·시청, 영등포, 강남)과 ‘7대 광역중심’(용산, 청량리, 창동, 상암, 마곡, 가산, 잠실)에 짓는 주상복합 건물은 35층 이상 높이를 허용하고 있다.
잠실5단지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 단지는 맞은편 롯데월드타워 등 업무·상업지구와 가깝다. 아파트 일부 부지가 준주거지역으로 용도변경 가능하다.
서울시는 또 준주거지역 건축연면적의 35%는 호텔, 컨벤션, 업무 등 비주거용도 건물로 지어 기능적으로도 광역중심에 맞췄다. 공원, 학교 이외에도 한강명소화를 위한 문화시설 도입, 단지 내부 도시계획 도로 등을 설치하는 조건도 걸었다.
현재 15층 3930가구로 구성된 이 아파트는 재건축 후 최고 높이 50층, 6401가구 규모로 새롭게 건립된다.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내년 중순부터 이주가 이뤄질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전망한다. 앞서의 공인중개사는 “거래절벽이 예상되지만, 잠실5단지 사업이 큰 차질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한동안 8·2 부동산 대책 전 수준의 관심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반면 같은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인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곳곳에서 깊은 한숨만 나온다. 이곳 부동산 관계자들은 대부분 취재를 거부했다. 한 공인중개사는 “기사가 나가면 집값만 떨어지고 속만 상한다”며 “분위기가 이러니 양해해달라”고 말했다. 은마아파트 상가에 들어선 부동산공인중개업소 벽면에는 매물 전단이 가득 붙어 있었다. 월세가 대부분이었지만, 시세보다 낮은 급매물도 눈에 띄었다.
은마아파트는 잠실5단지보다 두 살 어리다. 1979년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세웠다. 정 전 회장이 이 아파트로 벌어들인 돈을 기반으로 개포동 미도아파트까지 지으면서 ‘강남불패 신화’라는 단어도 나왔다. 현재 대치동과 개포동은 강남뿐만 아니라 국내 최고 부촌 중 하나로 꼽힌다. 18년 전 재건축 사업 계획이 처음 알려졌을 때 이 아파트가 금마(金馬)아파트로 불린 이유다.
은마아파트의 재건축 사업은 현재로선 불분명하다. 8월 16일 서울시는 제14차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에서 은마아파트 재건축 정비계획안에 ‘미심의’ 판정을 내렸다. 심의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은마아파트 측은 현재 14층인 아파트를 철거하고 최고 49층 높이의 새 아파트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다. 잠실5단지와 같이 용도를 일반주거에서 준주거지역 및 일반상업 지역으로 변경해 고층 증축을 하는 게 목표다.
지난 6월 국토교통부와 서울시의 ‘영동대로 지하공간 복합개발 기본계획안’ 발표와 더불어 서울시의 영동대로변 대규모 전시컨벤션센터 조성 계획 검토 소식이 그 근거다. 이 계획대로라면 은마아파트 인근인 학여울역 일대는 오는 2021년까지 서울 최대 전시컨벤션센터로 달라진다. 삼성역 일대 코엑스보다 큰 규모다.
하지만 서울시는 ‘명분’이 없다는 입장이다. 잠실5단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못박았다. 은마아파트가 잠실5단지와 비교해 학여울역 일대와는 거리가 있고, 양재천으로 인해 주변과 단절된 주거지여서 예외 적용을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서울시의 입장을 두고 은마아파트 측과 부동산 전문가, 서울시 관계자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은마아파트가 일정 부분 양보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아파트가 사유재산이지만, 재건축으로 조합원에게 돌아갈 초과 이익이 크기 때문에 공공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잠실5단지 사업의 ‘사실상 승인’도 따져보면 조합 측이 서울시가 원하는 공공기여 정책을 대부분 수용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잠실5단지는 재건축이 진행되면 전체 44개 동으로 구성될 예정인데, 50층은 잠실역 주변에 위치한 3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잠실5단지는 서울시의 교통·문화시설, 공공시설 등 요구를 거의 대부분 수용했다. 사실상 잠실5단지가 서울시의 확고한 계획에 그대로 맞췄다고 보는 게 맞다”며 “은마아파트의 경우 도시계획위원회가 ‘부결’을 내렸다면 앞으로 5년간 재상정도 불가능했지만 ‘미심의’ 결정을 내리면서 변경안을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은마아파트 관계자는 “조합원들과 서울시, 전문가 등과 대화를 하며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짧게 답했다.
문상현 기자
moon@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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