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년 365일 도서관에서 사는 저는 철마다 책의 장르를 바꿉니다. 1년 내내 비슷한 책만 읽는 건 식상하잖아요? 봄에는 가벼운 에세이로 한 해를 시작하고요. 더운 여름날에는 공포소설이나 괴담으로 피서를 즐깁니다. 가을에는 깊이 있는 철학서나 과학책을 읽고요. 겨울엔 긴긴 밤 오래오래 붙들 수 있는 대하소설을 읽습니다.
지난 여름, 간담이 서늘해지는 읽을거리를 찾다 발견한 책이 ‘보건교사 안은영’입니다. 퇴마사 이야기의 학원물 버전이라는 소개에 책을 집어 들고 보니 작가의 이름이 낯이 익어요.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SF 코믹 로맨스 ‘지구에서 한아뿐’의 정세랑 작가님이군요. ‘와우! 건졌네, 건졌어!’
무서운 이야기의 배경으로는 학교가 잘 어울리지요. 저 역시 가장 어두운 기억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겪은 일들이거든요. 어둠의 기운이 몰려 있는 남녀공학 사립고등학교에서 보건 교사로 일하는 안은영, 귀신을 쫓는 퇴마사랍니다.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을 들고 악의 기운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인데요. 본격 호러물이라기보다 하이틴 버전의 상큼 발랄 코믹물입니다.
안은영 선생의 비밀을 아는 한 제자가 점쟁이 아줌마를 만나러 같이 가자고 졸라요.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진 아이는 자신의 연애운을 알고 싶은데, 점쟁이가 진짜 영험한지 퇴마사의 눈으로 좀 확인해달라는 거지요. 점쟁이의 충고가 인상적이었어요.
“네….”
“좋은 사람이었고 그만한 사람 다시 만나기도 어렵지만, 손님 운명의 짝은 40명은 만나야 나타날 거야. 그러니까 좀 별로다 싶어도 꾸준히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해요.”
“40명이요? 40명을 언제 다 만나요?”
“미팅도 있고 소개팅도 있고 사람 많이 나오는 자리는 다 가 봐요. (중략) 사람 두려워하지 말고 많이 많이 만나요. 게을러지면 안 돼요.”
저는 로맨틱 코미디 전문 연출가로서 블로그에서 가끔 사이비 연애 상담도 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 현실에는 없다. TV를 너무 열심히 보면 미모의 기준이 너무 올라가 연애하기 힘들다,’ 뭐 이런 뻔한 충고를 합니다.
저 점쟁이의 말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무엇이든 잘 하려면 많이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많이 만나봐야 하고요, 재미난 책을 읽으려면 많이 읽어야 합니다. 가벼운 만남이 많아야 연애가 쉬워집니다. 책도 마찬가지예요. 한번 잡으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어려운 책보다, 술술 잘 읽히는 책이 읽는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누가 재미난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저 점쟁이의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만화도 있고 소설도 있고 에세이도 있고 서점이나 도서관에는 다 가봐요. 책 읽는 거 귀찮아 말고 많이 많이 읽어요. 게을러지면 안 돼요.”
작가는 이 책을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다고 하는데요, 그 말에는 과장이 없어요. 책 끝에 나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소설 주인공 이름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을 읽다 빙긋이 미소 짓게 되네요. ‘지구에서 한아뿐’의 첫머리에서는 부모님에게 바치는 헌사가 감동이었어요.
정태화 아빠, 김상순 엄마께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일 거예요.
정세랑 작가님께
아무리 해도 님이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을 타고 났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로또를 사지 않습니다. 어려서 꿈은 돈 벌어 책을 마음껏 읽는 것이었어요. 도서관에 갈 때마다 느껴요. 꿈은 이미 이루어졌노라. 평생 책 읽는 즐거움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 이미 최고의 행운입니다. 이보다 더 바라면 욕심이지요.
김민식 MBC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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