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소개했던 책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덕분에 오래된 궁금증 하나를 풀 수 있었다. 한국 산업화를 촉발한 요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어마어마한 대외원조(ODA) 덕분에 한국의 산업화가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대외원조를 받은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라며 이는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고 반박해왔었다. 이 대목에서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193~194쪽을 인용해보자.
우리나라가 받은 ODA의 규모는 절대 규모 차원에서 보면 ODA를 받은 나라들 중에 약 20위 정도의 수준에 속한다. (중략) 그러나 인구규모나 경제규모를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받은 ODA 수량은 중위권 정도를 차지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원조 덕분에 이뤄졌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규모의 원조를 받은 인도나 이집트, 그리고 파키스탄 등의 나라가 아직 1인당 국민소득 2000달러 미만의 소득 수준에 머무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한국 산업화에 가진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산업화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의 주류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주도하에 산업화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1961년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는 수출 중심의 공업화 전략을 수립하고 실질적으로 집행했다는 것이다. 특히 1960년경까지 한국경제는 근대적인 성장의 길에 접어들지 못했으며, 이는 상당 부분 군사정변 이전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 때문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지곤 한다.
이에 대해 ‘한국경제의 재해석’의 저자, 김두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책 103쪽).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런 전통적인 설명에 대해 다양한 비판과 대안적인 설명이 제기되었다. (중략) 1950~1960년대 통계를 재검토하고 기존의 연구를 종합함으로써 한국 경제성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체계화하고자 한다.
새로운 해석의 핵심은 (중략) 한국 경제성장의 기반이 1960년대 전반이 아니라 그보다 이른 1950년대에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렇지만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경제성장률 통계에서 1960년대 한국 경제가 비약적인 상장을 기록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래 표 4-2에 나타난 바와 같이, 195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면 1960년대 전반의 연평균 성장률은 5.3%,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10.2%라는 실로 믿기지 않는 성장을 기록한다.
이에 대해 김두얼 교수는 근대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한다(책 109쪽).
1965년부터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언제 그리고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를 차분하게 돌이켜 보지 못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만일 고도성장이 근대적 경제성장이라고 놓는다면 ‘전통적인 견해’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경제를 살펴보면, 10%에 가까운 고도성장이 유지되는 기간은 오히려 매우 특수하다. 따라서 근대적 경제성장의 출발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이 대목에서 고(故) 앵거스 매디슨 교수의 역사적인 작업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앵거스 매디슨 교수는 기원전후부터 1998년까지 긴 시간 동안 주요국은 물론 세계경제의 성장률을 집계하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참고로 앵거스 매디슨 교수의 연구는 세계경제사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앵거스 매디슨 교수의 데이터를 요약한 아래 표를 보면, 세계경제 성장률이 0% 수준을 벗어난 것은 1820년 이후 산업혁명이 본격화된 다음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서유럽의 1820~1998년의 1인당 GDP 성장률도 1.51%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1950년대 후반 한국이 연 평균 1.6%의 1인당 GDP 성장을 기록한 것을 가지고 “근대적 성장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과한 느낌이다.
물론 이에 대해 “전후 복구 과정에서 경제성장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반박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성장을 달성한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김두얼 교수의 지적도 충분히 근거가 있다(책 114~115쪽).
이 견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먼저 전쟁으로 인한 파괴로부터의 복구를 당연한 것처럼 전제한다.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한국 경제는 1953년 휴전 이후 복구를 하지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으며, 복구는 훨씬 이후에야 혹은 훨씬 느린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당시 한국의 낮은 소득 수준을 고려한다면, 전쟁으로 인한 파괴는 한국경제를 ‘가난의 덫’에 가둬 돌이킬 수 없는 침체로 끌고 갈 가능성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시기의 높은 성장을 당연시 하는 것은 당시의 경제현황을 적절하게 평가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한국이 제조업 중심의 성장 전략을 채택한 것은 60년대 초반의 일 아니냐”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역시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김두얼 교수는 지적한다(책 116쪽).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도 제조업 생산은 47에서 100으로 증가하고 있었다(1960=100). 이는 1960년대 전반의 생산 증가와 거의 맞는 수준이다. 즉, 두 기간 동안의 연 평균 성장률을 계산해보면, 1955~1960년까지 13.6%, 1961~1965년까지는 12.3%로 1950년대 후반의 산업생산 증가율이 1960년대 전반보다 더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표 4-3에 잘 나타난 것처럼, 한국 수출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방직 산업은 1955~1960년 사이에 10.9%의 놀라운 연평균성장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수출 주도 경제성장의 발판은 이미 1950년대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드는 마지막 의문은 ‘수출’에 대한 것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에서 수출은 매우 미미한 비중에 그쳤지만, 1960년대부터 방직공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건 박정희 정부의 공이 아닐까?
이에 대해 김두얼 교수는 면방직 공업의 사례를 들어서,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책 127쪽).
면방직 산업은 종전 이후 빠르게 생산을 늘렸다. 1954년에는 이미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으며, 1958년에는 전쟁 전 수준의 2배가 넘는 제품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빠른 생산증가로 인해 1955년에 접어들면 이미 ‘과잉생산’의 조짐마저 나타났다.
우리가 몰랐던 진실이 속속 드러난다. 그럼 왜 당시 한국은 이런 ‘과잉생산’ 물량을 수출로 돌리지 않았을까? 김두얼 교수는 그 이유를 미국의 수출 비협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책 128쪽).
면방직 생산자들은 (공급과잉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수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1957년 10월 ‘조사통계월보’에서 “해외 수출이 현저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출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이 수출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원조를 통해 공급된 원면으로 생산된 제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것을 매우 제한된 수준으로만 허용하였다. (중략) 수출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에 접어들어 미국이 수출에 동의를 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면방직 제품의 수출은 큰 폭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상의 이야기는 한국 경제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이미 근대적인 성장을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물론 박정희 정부가 수출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을 추진하고 더 나아가 경부고속도로 등의 인프라를 적극 늘린 공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195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되었던 경제성장, 특히 면방직 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생산의 증가가 없었던들 1960년대 그토록 놀라운 경제성장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함께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자는 것뿐이다. 경제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며, 경제 현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과 과를 함께 바라보는 균형 잡힌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Angus Maddison(2001), “The World Economy: A MILLENNIAL PERSPECTIVE”, OECD Development Centre Studies.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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