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들었던 국사 수업 시간이었다. 밥을 먹고, 운동장에서 땀을 빼고 듣는 국사 수업은 병든 닭들의 모임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수업을 들었지만 아직까지 기억난다. 바로, 정조의 능행차다.
10년이 지나 희미해진 기억에 검색을 더해서 퍼즐을 완성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 현륭원을 13차례나 참배했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같이 행차했다. 수원 화성 건축과 함께 한 행차는 단순히 효심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행차를 통해 왕의 권위를 나타냈고, 백성의 충성을 결집했다고 한다. 행차에 쓰인 말이 799마리, 동원 인원이 6000명이라니 어마어마하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는 항상 패거리로 위세를 뽐내려 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조가 행차하는 와중에 많은 백성의 호소를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1km에 달하는 행차 행렬에 수천 명의 백성이 붙어 각자의 사연을 호소한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호소하고, 정조는 그 사연을 들어주고 문제를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왕의 용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행렬이었지만 그 본질은 공론장이었다.
시민이 지도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최근 청와대는 홈페이지에 게시판을 열어 국민의 청원을 모았다. 국민들은 무엇을 청원했을까. 시설의 개선 따위 언급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여자에게 군대를 가라는 청원이나 탁현민을 비판한 여성가족부 장관의 경질 제안이 상위권에 있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반대한다거나 빈곤 여성을 위한 집값 지원정책을 폐지하라는 것도 포함됐다.
상위권에 올라온 사연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언급한 청원 대부분은 약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거나, 약자의 바람이 아니었다. 약자를 배제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청원이었다. 군대에서 생긴 트라우마를 여성에게 풀거나, 임용고시의 어려움을 자신과 같은 약자인 비정규직에게 푼다. 위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아래를 향한 화풀이다.
결국 대통령에게 청원할 수 있는 공간에 약자가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생존을 위해 던진 목소리는 없었다. 오히려 약자를 배제하려는 목소리가 가득 채웠다.
생각해보니 세월호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화문 지하철역에서 1842일 동안 있었던 장애등급제 및 부양의무제 폐지 농성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장이라는 공론장에서 사람들은 약자의 목소리를 지우려 했다.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폭식을 하고, 농성하는 장애인에게 오물을 던졌다. 온라인 공론장도 마찬가지다. 약자의 청원을 담는 공론장은 무너진 지 오래다.
정조가 능행차를 하며 백성의 청원을 들은 지 222주년이다. 222년이 지난 후 공론장은 무너졌다. 이제 사회는 답해야 한다. 약자를 배제하는 청원이 가득한 공론장에서 약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릇을 뺏기지 않으려는 이기심과 약자를 향한 손가락질로 공론장이 채워졌을 때 약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문제를 공론화하는 공론장이 문제적으로 변했을 때 사회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말이다.
구현모 알트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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