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의뢰인(성폭력 피해자)은 한 달 전부터 급격히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사건 이후 좀 차분해졌던 것 같은데 가해자의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나오라는 소환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검사는 우리 편이고요, 우리는 피해자이자 유일한 증인이기 때문에 판사는 최대한 우리를 편안하게 해줘야하거든요.”
소용없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냥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이자 증인인 사람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법정에 출석할 수 있게끔 증인보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 내용은 ①증인신문 전후 직원이 법원 입구에 나와서 동행하고 보호 ②재판을 비공개로 돌려서 피고인은 물론이고 방청객까지 모두 퇴장 ③가족이나 피해자 변호사 등 신뢰관계 있는 사람의 동석 ④그래도 불안한 경우 법정이 아닌 법원 내부 별도의 안락한 공간에서 원격중계장치로 증언하는 방법까지 마련되어 있다.
증인소환장을 받자마자 곧바로 “증인지원절차 신청서”를 제출했다. 물론 위 모든 방법을 다 선택해서 말이다. 대략 재판 한 달 전쯤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 신청이 채택되었는지, 판사의 의견은 어떤지, 재판 1주일 전까지도 통 연락이 없다. 그리고는 재판 하루 전날 우리 의뢰인에게 법원 공무원이 전화가 와서 내일 재판 30분 전까지 증인지원실로 오라고 하며 위치를 알려줬다.
법원 연락은 못 받았지만 의뢰인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재판 30분 전 그곳에서 의뢰인을 만났다. 그때 내 사무실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변호사님, 법원에서 방금 전화 왔는데요, 증인지원실이 어디어디에 있으니까 거기로 오면 된다고 하네요.” 이런다. 그래서 “방금 전화왔다고요? 아, 네…” 하고 증인지원실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법원 직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웃는 모습과 환대가 나쁘지 않았다. 증인지원실은 마치 카페의 VIP룸처럼 아늑하고 청결했다. 클래식 음악도 나왔다. 동행한 의뢰인의 언니와 함께 우리는 일제히 “와, 좋네요”라며 푹신한 소파에 저마다 기대앉았다. 준비되어 있는 과자와 차도 마시면서 사건과 관계없는 일상 대화들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의뢰인이 물어보기를 “변호사님, 근데 화상증언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저 TV에는 카메라가 없는 것 같은데요?”라고 했다. 화상증언 신청한 것이 처음이라 밖에 있는 직원을 불러 물어봤다. “화상중계장치 증언장비는 있다가 여기로 들어오나요?” 그러자 그 직원은 난색을 표하더니 “아, 혹시 중계장치 신청하셨어요?”라고 한다.
그는 서류를 잠시 뒤적이더니 “아, 신청하셨네요”라고 한 후 다급히 담당 부장판사에게 전화를 해서 “판사님, 중계장치 신청한 분인데요. 어떻게 할까요? 지금 재판 시간이 다 되어서요”라고 한다. 한 달 전에 신청했는데 지금 보고를 하다니. 그것도 의뢰인이 다 들리는 곳에서. 직원이 전화를 끊고 우리에게 묻는다. “저, 화상증언 하시면 아무래도 판사님이 직접 사건 파악하기가 좀 어렵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인가. 상황이 복잡해질까 염려한 의뢰인이 먼저 나선다. “판사님만 대면하는 것은 괜찮아요. 다만 다른 사람들은 좀….” 직원이 냉큼 말을 받는다. “그럼 법정으로 내려가시되 판사님만 보는 것으로 하고 검사님과 피고인 측 변호사 방향은 차단막을 세울게요. 그렇게 하면 되겠죠?” 의뢰인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우리는 공무원을 따라 법정으로 내려갔다. 증인지원실에서 법정으로 가는 통로는 판사들이 다니는 별도의 공간이다. 일반인, 변호사, 피고인들과 완전히 차단된 법원 내 비밀 통로. 그 미로와 법정이 닿는 곳에 또 하나의 증인지원실이 있다. 이곳도 시설은 아주 좋다. 방 안에 화장실도 있고 역시 차분한 클래식과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 재판 시작 전 단 몇 분이라도 피해자에게 불편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세심함이 보인다.
그 세심함을 누리고 있던 그때, 직원이 다시 나타났다. “저기, 차단막 꼭 하셔야겠어요?” 이 무슨 또 한 단계 진화한 망언이란 말인가. ‘우리는 당신의 업무상 편의를 놓고 밀당을 할 이유가 없다고’. 그러나 화를 낼 수 없다. 나는 의뢰인의 대리인이고 방어막이며 보호자이기에 최대한 이성적이고도 차분한 언행을 유지해야 한다. 내 감정까지 드러내게 되면 예의도 아닐뿐더러 의뢰인의 혼란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직원에게 “이미 정리가 다 된 이야기를 다시 할 필요가 있나요?” 다만 눈을 좀 크게 떴나보다. 직원은 “아, 그러세요? 아니, 화는 내지 마시구요”라고 응대한 뒤, 돌아서면서 들릴 듯 말 듯 “거 참, 되게 예민하게…”라고 속삭였다.
콰쾅. 실수를 하고 말았다. 공무원을 되돌려 세워 리얼하게 화를 내버렸다. 증인보호제도 취지도 좋고, 시설들도 좋고, 환대도 다 좋았다. 그런데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인권의식이라는 알맹이가 실무자들에게 없었다. 그러니 신청서를 한 달 전에 내봐야 적시에 관심 있게 일을 처리하지도 않고, 조심성 없는 언어폭행으로 피해자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아, 법원이시여! 아, 공무원님들이시여! 제도와 설비로 과시와 전시는 할 수 있습니다만,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제도와 이 시설 투자를 결정한 뜻에 맞게 확실한 인권교육을 통하여 인권감수성 또는 영혼을 장착합시다.
류하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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