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None but the brave deserves the fair).’
1989년 친구들과 같이 서울의 한 재개봉관에서 이 격언에 꼭 들어맞는 영화를 보면서 나누던 대화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 친구가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 있지?” 다른 친구가 말했다. “아니 애까지 있는 이혼남이 결국 아름다운 처녀의 사랑을 쟁취하네. 남자는 용감하고 봐야 하나. 에이 도둑놈아.”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가 소녀티를 벗고 22세 되던 1988년 출연해 국내에서 ‘유 콜 잇 러브’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영화 얘기다. 영화 원제는 여학생이라는 뜻의 프랑스 단어 ‘레뜌디앙뜨(L’Etudiante)’(1988)다. 개인적으로 소피 마르소가 출연한 영화를 상당수 봤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의 미모는 절정에 달했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외모적 특징이 오묘하게 조화된 그녀의 매력은 1980~1990년대 청순미의 끝판왕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요인이었다. 필자는 청소년 시절 그녀의 사진이 들어간 연습장과 책받침만 썼을 만큼 소피 마르소의 광팬이었다.
소피 마르소는 고생이란 걸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1966년 프랑스 파리에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주중에 식당 일을 도왔고 아홉 살 때 부모가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출생 탓인지 소피 마르소는 진보적인 정치 성향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내건 장 마리 르펜에 대한 반대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인권 탄압을 이유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서훈도 거부했다.
‘빛을 머금은 자. 언젠가 빛을 발휘한다’고 했다. 소피 마르소는 1980년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라붐(La Boum)’에 출연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예쁘게 성장한 14세 딸의 사진을 에이전시에 제출하면서 연예계 관계자들에 눈에 들었다고 한다.
연기를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소피 마르소는 ‘라붐’에서 여주인공 ‘빅(Vic)’역에 캐스팅 돼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프랑스어로 Boum은 남성명사로 ‘쾅’, ‘대성공’을 뜻한다. 따라서 남성 명사에 붙는 관사 ‘Le’를 붙여 ‘르붐(Le Boum)’이라고 해야 문법에 맞다. 그러나 소피 마르소가 극 스토리를 이끄는 주인공이라 여성 명사에 붙는 관사인 ‘La’를 붙였다고 한다.
‘라붐’은 소녀 빅이 파리로 이사해 첫사랑을 경험하는 영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디지털 리마스터링 판으로 상영되기 전까지 극장에서 개봉되지 못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무리한 잣대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은 이 영화가 프랑스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10대 문화와 이성친구와 성생활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하는 장면 등을 문제 삼았다.
‘라붐’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댄스파티에서 잠시 음료와 간식을 먹던 빅에게 남자 친구 마띠우가 헤드폰을 들고 와 귀에 씌워주는 순간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던 장면이다. 이 노래는 영국 출신 가수 리처드 샌더슨이 부른 영화 주제가 ‘리얼리티(Reality)’다. 이 장면과 음악은 ‘써니’(2011)에서 준호(김시후 분)가 나미(심은경 분)에서 그대로 따라 했다. ‘써니’에서의 재연으로 소피 마르소를 잘 몰랐던 사람도 ‘써니’의 인기로 그녀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편의 성공에 힘입어 ‘라붐 2’(1982)가 제작됐다. 2편에선 영국 소프트록 그룹인 ‘쿡 다 북스(Cook Da Books)’가 부른 주제가 ‘유어 아이즈(Your eyes)’도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는 1편과 달리 1986년 국내에 개봉됐고 필자는 그간 사진으로만 봐왔던 소피 마르소의 아름다움을 극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소피 마르소는 청소년 스타로 각인된 자신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1984년작 ‘행복한 부활절(한국 개봉명 나이스 줄리)’에서 반항적인 불량소녀 줄리로 나와 충격을 줬다.
이 영화는 지금은 없어진 서울 국도극장에서 1986년 개봉했는데 영화 광고를 통해 소피 마르소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낳았다. 당시 ‘소피마르소 할머니가 한국인이다. 100만 명 관객을 동원하면 소피 마르소가 한국에 시집 올 수 있다’ 등등 말도 안 되는 영화 홍보문구가 난무했었다.
소피 마르소는 그 후 ‘지옥에 빠진 육체’(1986) 등 과감한 노출 연기를 감행해 청순한 모습을 기억하던 팬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면서 이미지 변신에 완전 성공했다.
그리고 그녀는 전술한 ‘유 콜 잇 러브’에 출연했다. 영화 도입부에서 스키장 케이블카가 정지하면서 소피 마르소가 얼굴을 꼭꼭 싸맸던 스키 모자, 머플러, 고글,마스크를 벗고 아름다운 얼굴과 얼굴선을 드러낸다. 이때 영상에서 노르웨이 출신의 가수 카롤리네 크루거(Karoline Krüger)가 부르는 주제가 ‘You call it love'가 절묘하게 흐르는 장면은 지금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회자된다.
영화는 작곡가이자 이혼남인 네드(Ned)가 대학교수를 꿈꾸는 중학교 교사 발렌티느(Valentine)를 보며 첫눈에 반해 속된 말로 작업을 걸어 끝내 사랑을 쟁취한다는 줄거리다.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한다면 처한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다.
소피 마르소는 20대 후반이 되면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1995년 멜 깁슨 감독·주연의 ‘브레이브 하트’(1995)에서 스코틀랜드의 민족 영웅 윌리엄 월레스를 사랑하는 영국 공주 이사벨라 역을 맡으면서다.
007 시리즈 19탄 ‘007 언리미티드’(1999)에서는 악당 본드걸인 엘렉트라 킹을 연기해 생애 첫 악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소피 마르소는 국내에서 해외 유명 연예인 CF 모델 기용이 붐을 이뤘던 1989년 화장품 드봉 CF에 출연해 2억 원을 받아 고액 출연료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 금액은 한국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였다.
그해 그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토크쇼인 ‘자니 윤 쇼’에 출연했다. 당시 자니 윤과 조영남은 한국 말을 모르는 소피 마르소에게 엄청난 실례를 보여 도마 위에 올랐다. 예를 들어 그녀의 이름인 ‘소피’를 ‘소변’ 또는 ‘선지(소의 피)’로 놀리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소피 마르소는 10~20대 시절의 청순미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면서 여전히 기품 있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의 연기 인생은 쉰을 넘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00년대 이후 국내 극장에서 프랑스 영화는 잘 개봉되지 않았다. 따라서 소피 마르소의 현재 활약상을 찾아보기 어려워 아쉽다는 생각이다.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프랑스 영화 수입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은 이래서 나온다.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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