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7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핵심 인물로 지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박영수 특별검사가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2월 28일 이 부회장이 재판에 넘겨진 지 5개월 만이다. 국정농단 사건 가운데 가장 이목이 집중된 이 재판의 공은 25일 선고를 내릴 재판부에게 넘어갔다. ‘비즈한국’이 현장에서 기록한 특검과 삼성 측의 치열한 공방 속 결정적 장면을 돌아봤다.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였다. 밖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뜨거운 날씨였지만 ‘그곳’의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재판 시작 전 나누던 사건 관계자들의 가벼운 환담도, 방청석의 소란도 이날만큼은 없었다. ‘세기의 재판’이라 불리며 152일간 이목을 끌었던 대장정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시작됐다.
3월 9일, 첫 공판준비기일을 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재판은 이날까지 총 3회의 준비기일과 53회의 정식 공판기일이 진행됐다.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데다 대통령 탄핵까지 연결된 만큼, 3만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수사기록이 검토됐고, 심리가 자정을 넘겨 진행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번 사건에서 이 부회장이 받고 있는 혐의는 총 5가지다. 이 가운데 지난해 12월 국회 국정조사 위증죄를 제외하고 뇌물죄 및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 등 4개 혐의가 핵심이다. 특검은 삼성이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승마지원 명목으로 주거나 약속한 금액과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433억 원에는 뇌물공여 혐의를, 이중 실제 지급한 298억여 원에 대해서는 특가법상 횡령 혐의를 적용했다.
문제는 이 혐의들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번 재판에 증인이 무려 59명이 참석한 이유다. 이 때문에 결정적 장면 역시 대부분 증인들의 진술과정에서 나왔다. 재판 준비과정부터 구형까지의 주요 장면들을 돌아봤다.
# 결정적 장면① 두 번씩이나 재판부 재배당
삼성그룹 창사 79년 만에 처음으로 총수가 구속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등 이목을 끈 만큼 재판 시작 과정도 관심을 끌었다. 재판부가 두 차례에 걸쳐 새롭게 배당됐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3월 2일, 특검이 기소한 국정농단 관련 피의자 30명에 대한 재판부 배당을 마쳤다. 재판부를 무작위로 배정하는 시스템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이 부회장 등 삼성 수뇌부 5명의 뇌물 혐의 사건은 형사21부에 배당됐다. 이 부회장에 발부된 첫 구속영장을 기각한 조의연 부장판사가 속한 재판부다. 법원 등에 따르면 당시 조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 영장 기각 건으로 부담을 느꼈고, 직접 법원에 재배당을 요청했다.
새롭게 배당된 재판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재배당됐다. 형사21부(조의연 부장판사)에서 형사33부(이영훈 부장판사)로 배당됐지만, 이번엔 이 부장판사가 최순실 씨 후견인의 사위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 부장판사는 “최 씨 일가와 인연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상황이었지만, 공정성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긴다면 재배당을 요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3월 17일 형사27부(김진동 부장판사)로 배당했다.
# 결정적 장면② 박영수 특검 “세기의 재판 될 것”
4월 7일, 이 부회장의 430억 원대 뇌물공여 혐의 등에 대한 첫 번째 공판이 열렸다. 앞서 박영수 특검은 이 재판에 대해 “세기의 재판이 될 것”이라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법정에 피고인 신분으로 처음 출석한 이 부회장은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지난해 12월 국회 국정조사 때부터 주목을 끌었던 ‘립밤’을 자주 바르고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였다.
첫날부터 특검과 변호인은 치열한 ‘창과 방패’의 공방을 벌였다. 이 부회장의 핵심혐의 4개는 모두 삼성 경영권 승계 특혜를 전제로 하고 있다. 특검은 이를 입증하는데 주력했고, 이 특혜 의혹만 해소하면 4개 혐의를 한꺼번에 벗을 수 있는 삼성 측은 “문화융성과 체육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박 전 대통령의 요청에 따른 대가 없는 지원이었고,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과 관련 없다”며 “객관적 증거가 아닌 예단과 선입견을 기반으로 특검 조사가 이뤄졌다”고 맞섰다.
# 결정적 장면③ ‘합병 찬성 압력’ 문형표 실형 선고
6월 8일 “경영권 승계와 관련 없다”는 앞서의 삼성 측 논리가 흔들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로 특검에 기소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앞서 특검은 국정농단 수사 과정에서 문 전 장관이 복지부 내에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가 삼성합병에 반대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안건을 다루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재판에 넘겼다. 특검은 문 전 장관이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통해 ‘합병이 성사될 수 있도록 잘 챙겨보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받은 것으로 파악했다.
특검이 삼성합병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핵심 장치로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법원이 삼성합병에 대한 문 전 장관의 압력을 사실로 인정하면서 이 부회장 사건의 중심추는 특검 측으로 크게 기울기도 했다.
# 결정적 장면④ 안종범 “삼성 합병에 청와대 개입 없었다”
반면 삼성 측에 힘을 실어주는 증언도 나왔다. 국정농단 사건의 ‘사초’로 평가되는 업무수첩을 작성한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입에서다. 안 전 수석은 7월 6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대한 지시를 받지도 않았고, 합병 후 순환출자 해소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하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자신의 ‘업무수첩’에 이 같은 내용이 없는 것을 바탕으로 한 증언이었다.
이날 특검은 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의 독대(2015년 7월 25일)와 삼성물산 합병(2015년 7월 17일) 관련 내용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에서 삼성물산 합병 관련 청탁이 오갔고, 이에 따라 대통령이 관련 지시를 내렸는지 여부는 이 부회장 재판의 한 축이다.
특검이 주장하는 부정한 청탁과 대가 관계 합의가 성립하려면 독대 이후에 합병 결정이 나왔어야 하지만, 독대는 합병이 이미 성사된 후 이뤄졌다. 시점상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 부회장 1차 구속영장 기각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 전 수석은 “합병 자체나 헤지펀드 엘리엇 관련 이슈는 경제수석실 소관이며, 국민연금 의결권은 고용복지수석실 소관 업무”라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주주총회가 있었던 2015년 7월 17일 이후인 7월 20일 박 전 대통령에게 삼성물산 합병 관련 보고서를 작성, 서면으로 사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제 기억에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저한테 이 부분에 대해 대통령이 지시하거나 질문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결정적 장면⑤ 정유라 깜짝 등장, 특검-변호인 ‘장외공방’
7월 12일, 법정에 예상치 못한 증인이 등장했다. 최순실 씨의 딸이자, 삼성 승마지원의 핵심인물인 정유라 씨다. 정 씨는 하루 전인 지난 7월 11일 재판부에 증인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지만, 다음날 새벽 마음을 바꿔 ‘깜짝’ 등장했다. 분홍색 상의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 차림으로 법정에 들어선 정 씨는 “여러 사람이 만류했지만 검찰이 (증인으로) 신청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였으면 법정에 나오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날 정 씨는 특검과 삼성 측을 당황케 하는 증언을 했다. 그는 “삼성에서 나를 단독지원한다고 들은 적 없고, 다른 선수들과 함께 지원한다고 들었다”며 이 부회장 측에 유리한 증언을 하는 한편, 반대로 “어머니(최 씨)가 ‘삼성에서 살시도(정 씨가 탔던 말)의 이름을 살바토르로 이름을 바꾸라고 한 것이니 토 달지 말고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공주승마’로 문제가 됐던 내가 삼성이 소유주인 말을 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문제가 될 것이라며 화를 냈다”는 등 삼성 측에 불리한 증언도 쏟아냈다.
정 씨의 증언과 별개로 특검과 정 씨 측 이경재 변호사는 ‘장외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보도자료를 내고 “정 씨가 새벽 5시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특검은 재판 시작 전까지 5시간 이상 정 씨를 사실상 구인해 변호인과의 접견을 봉쇄하고 증언대에 세웠다. 위법이자 범죄적 수법”이라며 특검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특검은 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정 씨 본인의 자의적 판단으로 재판에 출석했다. 이 변호사가 주장하는 불법적인 증인 출석 강요는 없었다”고 밝혔다.
# 결정적 장면⑥ 김상조 “박근혜 허락 없이 이재용 승계 불가능”
시민단체 시절 ‘삼성 저격수’로 불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7월 14일 증인으로 출석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이 부회장 승계 작업의 일환”이라며 이를 부인하던 삼성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김 위원장은 또 “박 전 대통령이 용인하지 않고는 이 부회장이 편법 승계를 추진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정위원장 취임 전까지 경제개혁연대 소장 등으로 있으면서 삼성의 편법적 경영권 승계를 문제 삼아왔다. 김 위원장의 이날 법정 증언은 ‘강연’과 같았다. 그는 1994년부터 진행된 삼성그룹 차원의 경영권 승계 과정 역사를 10분가량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공직자로서 증인으로 나오는 데 심적 부담을 갖고 있다”면서도 “이 재판이 이 부회장과 삼성, 한국 경제의 미래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해 시민 한 사람의 의무로 증인으로 출석했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 연차를 낸 김 위원장은 개인차량을 직접 운전해 법원에 왔다. 이날 공판에는 박 특검도 직접 나왔다. 지난 4월 이 부회장의 첫 공판에 출석하고 40회차 공판에 두 번째로 나온 것이다. 김 위원장 증언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박 특검이 직접 법정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 결정적 장면⑦ 최순실 “재판장님께 할 말 있다”
7월 26일 최순실 씨가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최 씨는 이날 재판 내내 ‘자기 말’만 쏟아냈다.
본격적인 증인 신문 전, 증인 선서부터 최씨는 “그 전에 한 말씀 드리겠다”고 입을 열었다. 재판부의 제지에 따라 선서를 했지만 그는 “오늘 재판에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구인장을 발부했다. 저는 오늘 자진출석한 것”이라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최 씨는 특검 신문 중에도 “재판장님께 말할 게 있다”며 증언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정유라 씨 증인 출석을 예로 들며 강제로 증인신문을 강행하고 자신을 압박하는 특검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취지였다. 그는 또 “특검수사 당시 검사가 ‘삼족을 멸하고 손자를 가만 안두겠다’며 옛날 임금님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특검의 비정상적인 회유와 압박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며 모든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그러면 이 재판에 왜 나왔느냐”고 묻자 최씨는 “나오라고 해서 나왔다”고 답했다.
두 차례 휴정에도 최 씨의 ‘자기 말 증언’이 이어졌다. 특검과 삼성 측이 증인신문 종료 요청을 했는데도 최 씨는 “몇 가지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에 증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재판을 마쳤다.
# 결정적 장면⑧ 최지성 “책임은 내가 진다”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구형을 앞두고 마지막 피고인 신문이 열렸다. 8월 2일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 실장은 “최순실 씨 요구로 딸 정유라 씨의 승마 훈련비용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이재용 부회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며 그 이유에 대해 “책임은 제가 지고 이 부회장은 책임지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최 전 실장은 이어 “일부러 보고하지 않았다. 조사 당시에는 이렇게 뇌물 사건이 된다는 생각조차 못했지만 구설 정도의 문제가 발생하면 제가 이미 40년 넘게 일한 사람이니 책임지고 물러나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 씨 지원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최 전 실장은 “루머나 유언비어를 이 부회장에게 전했다가 누를 끼치면 그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최 전 실장은 승마 지원 프로그램 전반에 대해서는 이 부회장이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독대 때 언급한 승마협회 임원 교체 여부는 이 부회장도 함께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됐는데 이 부회장이 정 씨 지원만 몰랐다고 주장하자 특검이 이를 집중 추궁했다.
전날 피고인 신문을 받은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도 최 전 실장과 비슷한 취지로 진술했다. 장 전 사장은 2016년 2월 15일 독대 이후 이 부회장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이 준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계획안을 넘겨받았다는 기존 진술이 “추측이었다”며 돌연 기존 진술을 번복했다. 이 부회장이 아니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장 전 사장은 이 부회장은 미전실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미전실 직원들이 이 부회장에게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지도 않으며, 미전실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최 전 실장이라고 했다. 승마 지원도 최 전 실장이 결정했다고 말했다. 장 전 사장의 진술 번복이 이뤄지자, 재판부가 의문을 드러내며 질문하고 주장에 반박을 하기도 했다.
#결정적 장면⑨ 특검, 이재용에게 징역 12년 구형
박영수 특검은 8월 7일 오후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 임원 4명에 대한 결심 공판에서 “이 사건은 전형적인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범죄로 국민주권의 원칙과 경제민주화라는 헌법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며 이 부회장에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삼성 미래전략실 최지성 전 실장, 장충기 전 사장, 박상진 전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사장에는 각각 징역 10년을,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제가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았고 모두가 제 탓이었다는 점”이라며 “창업자이신 선대 회장님…”이라고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는 “대통령에게 부탁한다거나 기대한 적은 결코 없다. 너무나 심한 오해이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삼성을 대표하는 경영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이 부회장의 ‘멘토’ 역할을 했던 최지성 전 실장은 이때 뒤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기도 했다.
문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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