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현대미술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은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 아이디어만 짜낼 뿐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만 있으면 작가로 대접받는 세상이 됐다.
미술에서 아이디어가 창작의 주요 동력으로 떠오른 것은 20세기 들어서부터다. 현실을 재현하거나 해석하는 방법으로는 창작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발하고 엉뚱한 아이디어는 미술에서 새로움을 최고 가치로 여겼던 작가들에게 신천지 같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작가들은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려고 고민하기보다 어떤 것이 미술이 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몰두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검수 과정을 거쳐 인정받아야만 미술이 되었다. 아이디어를 정당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게 이론이다. 그래서 미술평론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떠올랐다. 기발하고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그에 따른 사용설명서가 따라 붙는다. 매뉴얼이다. 소비자는 광고나 언론 보도를 통해 신제품을 알게 되고, 구입 후 매뉴얼에 따라 사용한다.
현대미술에서 이론도 같은 기능을 한다. 일종의 ‘현대미술 사용 설명서’다. 따라서 매뉴얼을 모르면 작품에 다가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대미술이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이론 자체가 모호하니까.
이런 시대 분위기에 역행하는 현대미술을 만나면 반갑다. 김건일이 그런 작가다. 그의 그림에서 이론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아이디어에 의존하거나 모호한 이론으로 무장한 그림이 아니다. 보는 순간 느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채의 물질적 성질을 자신의 기법으로 소화해 신선한 감각의 풍경을 그린다.
대학에서 전통회화를 전공한 김건일은 자신만의 기법을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서양화 재료를 받아들였고, 전통회화에서 연마한 필력과 조형 방식을 유화 재료에 녹여내 독창적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는 짙은 녹색으로 화면을 덮은 후 거즈를 이용해 지워내는 방식으로 숲을 그린다. 일종의 핑거 페인팅인 셈이다.
김건일이 그린 숲은 자신이 본 현실의 숲을 그렸지만, 실은 숲을 그리기 위한 그림은 아니다. 단색조의 숲은 몽환적 분위기가 나며,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숲은 멀리서 바라본 모습과 가까이 가서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조망하는 숲이 관념적이라면 숲 속 세계는 실제적이다. 그리고 생존의 혈투로 늘 변화한다. 이런 숲의 속성에서 작가는 우리의 기억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을 눈에 보이게 그려낸다면 바로 이런 숲의 속성으로 가능하겠다는 생각. 기억은 다양한 식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숲의 속살처럼 다양한 생각이 축적되는 것이라는 생각. 그걸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전준엽
화가·비즈한국 아트에디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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