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이쯤 되면 영어 예찬을 할 법도 하다. 무턱대고 몰두했던 영어로 자신감을 얻은 청년은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고,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도 한편으론 통역사를 꿈꿀 수 있었다.
덜컥 MBC PD가 되어 ‘뉴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MBC 사태’로 비제작 부서로 좌천된 현재까지도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놀랍게도 영어다. 지난해 1월 출간한 영어 학습서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는 출간 4개월 만에 10만 부 판매를 돌파하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그는 또 다른 길을 꿈꾸고 있다. 지난 6월 2일 서울 중구 순화동 의 ‘비즈한국’ 사무실에서 주인공 김민식 PD를 만났다.
―공대를 졸업하고 3M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3년 뒤 돌연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 대학원에 입학했다. 연결고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꿈은 없지만 늘 그 순간 하고 싶은 일은 있었고 그것에 충실했을 뿐이다. 진로특강에서도 늘 ‘몇 년 열심히 해서 어떤 학교에 가느냐로 남은 평생이 결정 난다는 얘기는 다 뻥’이라고 얘기한다. 스무 살 이전의 삶으로 그 이후가 결정된다면 20세 이후의 삶은 의미 없는 것 아니냐. 공대에 진학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졸업 후 엔지니어가 되면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전공을 살리지 않고 먹고살 방법을 고민해보니 영업사원 외에 별 선택지가 없었다. 근데 일을 하다 보니 직장생활이 잘 맞지 않았고 프리랜서가 되는 길을 찾다가 통역사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대학원을 졸업한 이듬해에 돌연 MBC PD가 되었다.
“통역을 할 때 이상하게 재미를 살리는 쪽에 몰두했다. 주위 반응은 좋았지만, 교수님께서는 연사가 재미없으면 없는 대로 통역 해야지 그걸 각색하는 건 PD가 하는 일이라고 지적하셨다. 그 말을 듣고 ‘그럼 PD가 돼 볼까?’ 싶었다. 그러던 차에 기자를 준비하는 친구 대신 원서를 가지러 방송국에 갔다가 진지해 보이는 지망생들을 보니 새삼 내가 한심해 보였다. 얼굴이 안 받쳐주니 기자나 앵커는 무리일 거 같았고 마침 주위에서 재미있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던지라 예능 PD를 썼다. 언론사 준비생들은 되게 재수 없어 하지만 솔직히 스터디도 해본 적 없다. 저녁 10시까지 대학원 스터디를 마치고 중앙도서관에 가서 매일 2시간씩 언론사 기출문제집을 푼 게 다다.”
―지상파 방송 PD가 되기 힘들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머리가 좋다는 걸 인정해야 할 거 같다.
“정말 솔직히 얘기하자면 성공은 운이다. 내가 통번역대학원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지 얼마 안 돼 아직 국내파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입사한 1996년까지만 해도 MBC에서 PD를 1년에 15명씩 뽑았다. 근데 1997년 경제가 어려워지고 1998년 IMF가 오면서 두세 명밖에 안 뽑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386세대는 인정해야 한다. 개인의 노력도 많고, 민주화 공헌도 있지만 우리는 운 좋게 고도 경제 성장기에 올라타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제는 자녀세대로 부를 이전하는 걸 넘어 사회를 위해서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해야 한다.”
―‘뉴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으로 연출가로도 주목받았다.
“좋은 선배들에게 정말 많이 배웠다. 조연출 때는 주로 30초짜리 예고 편집을 시키는데 함께 작업하는 선배에게 완성본을 보여주면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니. 네가 PD니 완성했으면 그걸로 그만이야’라고 하셨다. 또 많이 봤다. 시트콤 ‘프렌즈’는 에피소드 당 최소한 10번씩은 봤다. 운전할 때도 녹음본을 들으면서 다니니 방청객 웃음이 깔리는 타이밍에는 배우가 호흡을 늦춰야 한다는 사실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2012년 MBC 파업 당시 노조 부위원장으로 나서며 현재까지 연출을 맡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후회 안 하나.
“안 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쉽게 간과한다. 당시 주변에선 ‘드라마 PD는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다’, ‘뉴스, 다큐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말렸다. 그래서 PD든 뭐든 월급 받아 작품 찍으면 노동자라고 대꾸했다. 내가 MBC PD로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건 ‘PD수첩’, ‘뉴스데스크’ 등이 세운 공정성으로 인해 MBC라는 브랜드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5년간 MBC라는 브랜드가 망가지며 요즘에는 아무리 작품이 괜찮아도 MBC 드라마는 좀처럼 화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와 무관한 일이 절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어 학습서를 쓴 건 어떤 생각이었나.
“원래 꿈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거다. 더 이상 연출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없으니 대신 스트레스를 주던 영어를 좀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또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영어를 잘 할 방법이 있으니 자녀를 유학이나 비싼 학원에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부모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왜 문법, 단어도 아닌 회화책을 암기를 강조하나.
“성인이라면 문법과 단어는 오랜 시간 공부했기에 어느 정도 개념은 있다. 그런데도 말은 못한다. 말을 내뱉기 전 발음, 단어, 문법 등 너무 많은 걸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일 쉬운 해결책은 가장 많이 쓰이는 기본 회화를 그대로 암기하는 거다. 물론 이걸로 영어공부가 끝나는 건 아니지만, 기본을 해 놓으면 유튜브, TED 등 즐기며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참 많다.”
―끈기를 가지고 완독할 것을 강조한다. 사실 누구나 처음엔 다짐하지만, 곧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작정해야 한다. 취직과 달리 영어공부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달린 자기계발이다. 예컨대 언론사 입사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안 될 수 있는 상대적 목표지만, 영어책 암기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절대적 목표다. 나는 이걸 한 번 꼭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목표를 끝냈을 때 오는 성취감이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재산이 될 거라고 자신한다. 내 경우 방위병 18개월 동안 혼자 영어 공부를 한 뒤 나간 대학생 영어 토론 대회에서 2등을 한 경험이 인생을 바꾸었다. 흔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 제대로 시도조차 안 해본 것들이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공부를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나는 산책하면서 암기한 걸 중얼중얼 내뱉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공부를 힘들어하는 건 도서관 같은 곳에서 앉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10분 정도 소리 내서 읽고, 출근길에 MP3 들으며 따라하고 쉬는 시간에 쓱 꺼내 보는 거다. 주말 하루 마음잡고 공부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반복하는 게 영어 공부의 핵심이다.”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라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학습 진도를 알리는 ‘댓글부대’를 정기적으로 모집하고 있다.
“흔히 창작이 일방향 소통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랜 시간 시트콤을 만들면서 타인의 피드백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이를테면 논스톱을 만들 때도 신인배우가 굉장히 많았고 나는 그들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가장 많은 피드백을 받은 배우가 조인성과 장나라였기에 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몰아줄 수 있었다. 댓글부대는 책과는 무관하게 도움을 드리고자 모집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열정적인 분들을 모아 밥을 대접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책에서 어떤 점을 보충해야 할지를 알게 됐다. 사람들은 귀찮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는 이게 내가 책을 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에게 SNS는 참 유용한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하면서 책 쓰고 공부할 시간이 되나.
“뭔가를 하고 싶다면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 글을 잘 쓰고 싶어 주변에 조언을 구하니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몰던 차를 아내에게 넘기고 출퇴근길에 대중교통 안에서 책을 읽었다. 또 저녁 약속도 끊었다. 일찍 들어가 9시 반쯤 잠들고 새벽 4시 30분쯤 일어나니 회사 출근 전 두세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그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고 지난해에만 250권의 책을 읽었다. 내가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독하다는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앞으로의 계획은.
“매년 한 권씩 책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되고 싶다. 일단 사람들에게 좀 더 잘 놀 방법을 소개하는 책을 쓰고 싶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은 놀이에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발달하는 앞으로의 시대에 일, 공부, 노동으로는 그것들을 이길 수 없다. 여행하면서 놀아보니 결국 나는 할 일이 없을 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노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
박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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