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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 음식 앞에서 겸손해지는, 라멘광의 '점보라멘' 도전기

드디어 거대한 라멘이 내 눈앞에 떨어지고 나는 도전을 외쳤다

2017.05.26(Fri) 09:46:27

[비즈한국] 나는 라멘을 매우 좋아한다. 어쩌면 세상 면으로 된 음식은 모조리 다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루룩 빨려 들어가는 면의 식감도 좋아하고, 남겨진 풍성한 국물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식당에서 1인분으로 나온 요리는 좀처럼 남기지 않는다. 

손과 비교한 점보라멘의 크기. 사진=남궁인


밥을 남기지 않는 버릇 때문이기도 하고, 1인분은 성인 남성인 내게 조금 모자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면이라면 더욱 그렇고, 흔하게 먹기 어려운 라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돼지뼈를 우리고 된장을 베이스로 고소한 면발을 우려낸 라멘은 항상 내게 1인분으로 아쉬웠다. 매번 내 앞에 나온 라멘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고, 일본에서는 늘 라멘집을 찾아다니며 두 그릇씩 비우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그러던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점보 라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요는 이렇다. 점보 라멘을 주문하면 한 명만 먹을 수 있는 4인분의 라멘이 나온다. 20분 안에 먹으면 이 라멘은 공짜고, 먹지 못하면 라멘 값 2만 원을 내야 한다. 구토하면 패널티 1만 원이 추가이며, 접시가 아닌 변기에 그 행위를 해도 마찬가지다. 도전은 무한정 가능하지만, 성공하면 다시는 할 수 없다.

약간의 사행성은 존재하지만, 2만 원으로 라멘을 무한정 먹는다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합리적일 수도 있다. 게다가 자신이 위대하면 2만 원의 행복까지 덤으로 느낄 수도 있다. 라멘을 좋아하고 잘 먹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도전해 볼만했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후기를 검색했다. 

“면을 2인분쯤 건져 먹었는데, 남은 2인분이 불어 도로 4인분이 되었어요.”​ “​라멘 국물이 바다와도 같았어요.”​ “​다 먹기는 했지만, 올해는 라멘을 다시 먹지 않을 것 같군요.”​ “​실패한 남친에게 실망했어요.”​ 등등. 그 후기들은 어떤 회한과 격정적인 토로와 합리적인 분석과 2만 원이라는 경제적 억울함과 연인에 대한 실망에 관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이 후기만으로 어떠한 기록적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하여간 세상일은 모두 도전해 봐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부터 일정이 없고 컨디션이 좋은 날이라면 한 번쯤 점보 라멘을 먹어보겠노라 다짐했다. 마침 요즘 식욕도 되찾았고, 대외적으로 별다른 일정도 없었다. 나는 드디어 마음속으로 오늘로 거사일을 정했다. 그리고 나는 매사 사소한 일이라도 준비하는 성격인지라, 어제부터 점보 라멘을 먹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푸드 파이터가 아닌 이상 내가 전문적으로 준비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냥 나 자신을 배가 고픈 상태로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어제 하루 종일 스스로에게 변변찮은 음식만을 먹이며 라멘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나는 라멘이 엄청 먹고 싶다, 나는 라멘을 엄청 먹고 싶은 만큼 엄청 많이 먹을 것이다. 올해 다시 먹지 않을 각오로 바다 같은 국물까지 먹어버려야지.’ 간밤에는 공복 때문인지, 아니면 도전 전야의 긴장감 때문인지 밤새 잠을 못 이뤘다. 나는 뒤척이며 또 다른 후기를 검색하다 잠깐 잠이 들었다. 찌뿌드드하게 일어나 역시 공복에 시달리다가, 늦은 점심에 드디어 도전을 하러 나섰다.

공복을 끌어올리기 위해 제법 먼 거리를 걸어 라멘집에 도착했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평범한 라멘집은 내 눈에 대단한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가게 앞에는 거대한 점보 라멘 그릇이 놓여 있었고, 식신 정준하와 슈퍼맨 송일국이 실패했노라고 당당히 적혀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아무도 없는 가게에 자리를 잡고 점보 라멘을 외쳤다. 

내 자리 앞에는 그간 점보 라멘에 도전해서 성공한 위대한 자들의 기보가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1등의 기록은 놀랍게도 3분이었다. 이 사람은 심지어 다 먹고 돈까스를 더 먹는 기행을 벌였다. 게다가 통계 자료도 있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1800명 정도가 시도했고, 약 200여 명이 성공했다. 성공률 11%. 나처럼 본인이 자신 있고 주변에서 많이 먹는 걸로 추앙받으며 단단히 준비까지 마치고 온 1800명 중 11%만 성공한다는 뜻이었다. 

도전자의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뒤에는 유명 먹방 BJ들이 몰려와 점보 라멘을 먹고 자신의 족적을 찍고 갔다. 벌써 그들에게서 선구자에 대한 존경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굳건히 다잡았다.

드디어 거대한 라멘이 내 눈앞에 떨어졌다. 놓자마자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고, 준비하고 도전할 의사를 밝히면 시작하는 매우 아량이 넘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면을 접시에 덜어 부려놓고 있었고, 종업원은 설명했다. “​다 드시면 공짜, 나중에 화장실이라도 토하면 음식값에 1만 원 벌금입니다.”​ 강조하는 걸 보니 토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알고 왔습니다.”​ 그리곤 실패자들의 잔혹한 몰골을 떠올리며 전신이 떨리는 긴장감을 느꼈다. 나는 비참하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기분을 느낀 것이 또 언제였더라. 2년 전 중국어 시험 답안 제출할 때 이후 처음인가. 하여간 이제는 물릴 도리가 없었다. 나는 곧 도전을 외쳤다. 종업원은 익숙하게 구호를 외쳤다. “​​많이 드세요.”​ ‘맛있게 드세요’도 아니고, ‘​많이 드세요’​였다. 이 특징적인 구호는 이런 곳에서만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와중에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후 도전기는 타임 테이블로 정리하겠다.

구토시 1만 원의 벌금을 추가로 내야한다. 사진=남궁인


# 20분

평범한 맛의 라멘이다. 아주 맛있지도, 아주 맛없지도 않다. 도전하기에는 나쁘지 않다. 이 라멘의 구성은 반으로 자른 네 개의 계란, 네 덩이의 차슈와 약간의 건더기, 수북한 면과 방금 군용 사발에서 그대로 엎은 듯한 다량의 국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도전기에서 예습했듯이, 저 국물이 포인트다. 최대한 초반에 많은 국물을 줄여야 한다. 짜더라도 물을 마시면 안 되고, 중간중간 느끼함을 없애는 반찬으로 중화한다. 일단 국물을 부은 면을 건더기와 빨리 없애고, 후반부 국물에 집중한다. 

나는 시치미를 조금씩 얹어 면을 먹기 시작했다. 고픈 배에 면은 쉽게 들어갔다. 점보 라멘의 외형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줄어가고는 있었다. 이제부터 승부는 시작이다.

# 15분

약 3인분의 면이 벌써 줄었다, 고 생각했는데 젓가락으로 휘젓자 다량의 면이 접시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어쩌면 이 그릇은 탐사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이 라멘은 나에게 라멘 맛이 난다. 많이 남았으나, 나는 아직 먹을 수 있다. 누가 이길지 아직은 모른다. 나는 한 번도 라멘을 남긴 적이 없다. 나는 라멘을 무척 좋아한다. 이 라멘도 안 남길 수 있을 것이다. 포만감이 느껴지기 전에 코를 박고 최대한 많이 먹자.

# 10분

진짜로 3인분의 면이 줄었다. 건더기도 다 먹었다. 남은 면은 약 1인분이다. 내 이마와 티셔츠는 땀으로 번들거렸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푸드 파이터들의 도전에서 본 것처럼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 뛰기를 해서 음식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금 남은 면은 씹기도, 삼키기도 부담스러웠다. 국물에서 진한 육수의 맛과 구수한 간장 맛은 오간데 없고 느끼한 맛만 났다. 내가 진정으로 라멘을 좋아한 것은 맞았을까. 내 사랑과 순정에 의구심이 든다.
약간의 면과 다량의 국물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30km 지점에 다다른 마라토너의 기분을 느꼈다. 남은 음식을 물리적으로 배 안에 집어넣는다면 나는 2만 원의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완주하면 마라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하여간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2만 원은 얼마나 큰, 얼마나 가치있는 돈일까. 일반적으로 모든 돈은 다 귀하다. 조금 더 먹자. 

나는 국물을 포함한 면을 한 점 떠 넣고 배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욕지기가 난다. 아, 이게 바로 구토에 대한 갈망이구나. 이 욕망을 참지 못해서 실제로 토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거다. 아마 입에서 점보 라멘을 그대로 쏟았겠지. 변기가 막히고 영 좋지 않은 꼴이었음이 분명하다. 벌금마저도 합리적이구나, 이 사람들. 

나는 재차 한 모금을 입에 넣는다. 그리고 이내 이 일이 내 건강에 좋지 않음을 느낀다. 이건 내가 의사라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라서 아는 것이다. 이미 이 점보 라멘이 다량으로 배에 들어있는 것만으로도 건강에 그리 좋을 것 같지 않다. 국물에서는 이제 느끼한 맛만 난다. 왜 사람들이 시간을 다 쓰지 않고 중간에 포기를 외쳤는지 알겠다. 이건 못 먹는 거다. 그리고 남은 국물의 양을 보았다. 조금 더 노력하거나 컨디션이 좋았다고 내가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러자 패배가 아쉽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못 먹는 거였고, 나는 하위 89%였다. 

그걸 확인하러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 국물을 조금씩 깨작거린다. 성공하기 위한 분배로는 턱도 없는 양이다. 세상은 넓고, 라멘을 나보다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며, 위대한 자들도 역시 많다. 게다가 나처럼 어리석은 자들은 더더욱 많다. 내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것을 더 먹어선 안 된다. 인아, 그만 먹고 다시는 이런 건 하지 말자.

# 2분

나는 이미 패배한 지 오래다. 시간아 빨랑 가라.
흔쾌히 결제를 마치고 나는 이태원 거리로 나왔다. 동작이 굼떴고 발걸음은 어기적거렸다. 무사히 이 라멘을 뱃속에 들고 집에 가야 할 텐데, 할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걸었다. 동서양을 망라한 이태원 길거리 음식점에서 풍기는 냄새가 역했다. 흔히 맛집에서 배불리 먹고 나온 느낌과는 약간 다른, 무엇인가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간신히 집에 들어오자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배가 심하게 불러 예민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운동을 할 수도 없었다. 둘 다 끔찍한 꼴이 날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배를 내밀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 자세를 버티는 것도 힘겨웠지만, 다만 나름 합리적으로 도전을 멈춘 탓에 사지를 뻗고 누워있는 자세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합리적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내 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통감했다. 

입안이 느끼했지만, 무엇인가 더 먹어서 이 느끼함을 중화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조금만 더 먹어도 배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억지로 이제 얼마 안 남은 ‘안나 카레니나’를 펴고 읽었다. 활자에서는 안나의 사랑과 현실에 대한 욕망이나 갈등 대신 인간의 식욕에 대한 허탈함과 회한이 느껴졌다. 인간은 왜 이토록 처먹고 후회하는가. 아, 톨스토이가 다른 작품에서 인간의 욕심을 그리지 않았나. 그게 ‘인간에게 땅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였나. 농부가 땅 욕심을 내다가 결국 죽어 땅에 묻히지. 나는 죽지 않으려나. 

아,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 나는 두꺼운 책을 눈가에 덮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기절에 가까웠다. 일어나니 늦은 저녁이었다. 배는 더부룩했으나, 다행히 전반적인 상태가 회복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썼다.

이성을 찾은 나는 이제 ‘도전! 점보 라멘!’ 대망의 총정리를 해본다.

# '도전! 점보 라멘!'의 장점

1. 다량의 음식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겸손해지는지 알 수 있다.
2. 2만 원이면 하루 종일 더 이상의 식대가 안 든다. 어쩌면 익일도 안 들 수 있다.
3. 혹시 불면증이 있다면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다.

# '도전! 점보 라멘!'의 단점

1. 먹고 난 후 약 6시간은 지적 능력을 잃는다.
2. 먹고 난 후 약 6개월간 라멘을 먹을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
3. 먹고 난 후 약 6년간 다량의 음식을 먹는 도전 능력을 잃는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만약은 없다’ 저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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