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벼락같이 시작된 19대 대선이 끝나고 ‘문재인 시대’가 열렸다. 그간 정치가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다. 그러나 대선후보 위주라는 한계를 가진 선거 보도 탓에 유권자는 보도의 주변으로 쫓겨나며,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청년, 특히 기성 매체와 기자의 범위 바깥에 있는 청년들은 더욱 그랬다. 청년들은 아직 할 말이 많다. ‘비즈한국’이 ‘미스핏츠’ ‘밀레니얼 오브 서울’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날이 선 채로, 날 것 그대로’ 풀어보는 ‘날;청년’도 계속된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감수성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기보다 불편하더라도 차라리 감수하는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세상은 돌아가고, 부조리는 이어져 간다.
구시대로부터 내려온 악습을 만났을 때 그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구세대와 신세대를 구분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 세대는 악습을 만나면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기성세대로부터 ‘프로불편러’, ‘사회부적응자’ 등 온갖 비꼼을 당하지만, 당당하게 소리를 내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핍박을 당한 22세 김윤경 씨도 그런 ‘프로불편러’ 중 한 명이다.
입이 트인 프로불편러가 되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마워. 멀리서 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더 고마워. 보통 이런 저녁 이후 시간엔 뭐해?
“평일 저녁에는 일단 쉬지. 내가 음악을 전공하다 보니 유튜브에서 음악 채널 위주로 구독해. 음악 채널 아니면 일본이나 미국 예능 올려주는 채널을 보곤 해. 아예 쉴 때는 그냥 쉬기만 해. 누워서 영화 보거나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전부야.”
―가만히가 뭐야?
“그냥 가만히 누워서 휴대폰 하는 거지. 트위터나 인스타그램만 해. SNS에 내 일상 올리는 게 그나마 취미야. 남이 뭐 하는지 보진 않고, 그냥 내 사진만 올려.”
―트위터랑 인스타그램이라니 그냥 쉬는 거 같지는 않네. 특히 트위터는 매일 전쟁터 아닌가?
“그건 그렇지. 그냥 쉬는 게 어디 있겠어. 그런데 요즘 SNS는 하면서도 너무 불편해. 혐오 표현이 너무 많아. 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제일 싫거든. 왜냐고 물으면 내가 그 혐오와 차별의 피해자였기 때문이야. 일단 법적으로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됐고, 여자이고, 정신과를 오래 다니기도 했어. 여러 방면에서 사회적 소수자로서 피해를 많이 봤어.”
“사실 이게 피해인지, 차별인지는 최근에야 알았어. 어릴 때는 이게 불편한데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야. 어떻게 표현할지를 몰라서 진짜 답답했고, 이 답답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피해라고도 생각 안 한 거야. 그런데 최근에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내가 왜 답답하고, 무엇에 답답하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어.”
“그렇게 답답함은 풀었는데, 오히려 불편함은 늘더라. 소위 ‘프로불편러’가 돼버린 거야. 근데,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왜 답답했는지 몰랐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솔직히 그때가 더 편했지. 오히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신경 안 쓰고 살 수 있었는데, 이젠 돌아갈 수 없어.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살았는지 깨달았는데 왜 돌아가겠어. 나는 사회적 소수자고, 약자고, 여러 문제의 당사자니까 이게 문제라는 걸 알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
차별하지 않는 건 배움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차이
―어떤 문제의 당사자였어?
“예전 얘기를 해볼게. 내가 너무 힘들어서 정신과에 상담 받으러 갈 상황이 왔어. 근데 아빠가 뭐라 했는지 알아? 내 탓이래. 바보 같은 게, 그때는 진짜로 내가 겪는 모든 문제가 순전히 내 탓인 줄 알았어. 그래서 자해까지 했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재작년 즈음부터 그나마 좀 나아졌어. 내 우울증이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까 멈추게 되더라. 사실 우울증은 완치가 되지 않아서 매일 충동과 싸워야 해. 자해 충동이 들 때는 있지만, 행동까진 옮기지 않아.”
―음악이 전공인데, 약 먹으면서 곡 쓰기 힘들겠다.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지면 노래를 못 써. 그냥 무기력해지거든. 그냥 계속 누워 있고 나아질 때까지 한 번도 안 일어나. 그거 알아? 정신과는 예약하고 나타나지 않는 ‘노쇼(No show)’가 많아. 심한 날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있고, 나가면 공황이 오니까 힘들어서 나가질 않지. 심할 때는 공황 때문에 쓰러졌을 때 쓸 봉투도 챙기고 그랬어. 상황이 이러니까 의사들은 정기적으로 오는 환자들한테 ‘꾸준히 오시네요. 잘하시고 계세요’라고 칭찬도 많이 해줘.”
―너는 환자이기도 하고, 인터넷도 많이 하잖아. 인터넷에서 그런 환자들을 비하하는 비속어를 쓰지 말자는 의견을 어떻게 생각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지. 근데 난 안 쓰면 좋겠어. 실제로 그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데 쓰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 굳이 그 단어를 쓰지 않고도 비난할 수 있는데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 예를 들어, ‘병신 같은 놈아!’ 할 때 그 병신이 누군지 다 안다고 생각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병신이 뭐냐고 물으면 다 똑같은 답이 나올 거야. 장애인을 지칭하면서 모자란 사람이라고 묘사할 거야.”
“‘쟤 정신병자다, 정신병자야’라는 건 그냥 대부분 조롱이고 정신병 환자를 그냥 조롱감으로 두는 거니까 안 썼으면 좋겠어. 그리고 ‘병신’ 같은 경우는 장애인협회에서 아예 쓰지 말아 달라고 했어. 난 그건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 욕을 하지 말자는 게 결국은 차별하지 말자는 뜻이잖아. 병신이라는 단어가 그리 소중한가? 그 단어 없으면 욕을 못하나? 그냥 대체하면 되잖아. 더 배우고, 덜 배우고의 문제가 아니야. 의지의 차이지.”
―단어 하나 바꿔봤자 뭐가 바뀌냐는 의견도 있는데, 이건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병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이런 언어 사용을 바꾸자는 것도 노력인데,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거 해봤자 바뀌는 거 없어’라고 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이해할 수 없어.”
페미니즘은 피할 수 없는 시류
―아까부터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상정하는데, 이유가 뭐야?
“왜냐고? 그냥 당연한 거잖아. 당연한 이야기고, 맞는 이야기고, 순리를 따르는 거야. 뭐 이유가 있겠어? 그냥 그게 나한테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야.”
―야권 여성 정치인들을 선호한다고 들었는데, 후원도 하고 있어?
“지난 총선 때 진선미 의원 후원했어. 내가 학생이니까 크게 하지는 못했어. 은수미 의원도 한 번 했어. 여성 의원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후원한 거야.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여성민우회에 문자로 소액 후원도 하고 그래.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후원상품도 사고, 여성주의 단체가 만든 배지나 티셔츠를 사. 금액은 적어도 후원부터 물품 구매까지 꽤 다양하게 하고 있어.”
―그러면 여성주의를 말하는 후보를 지지할 거 같은데, 문재인이었어, 심상정이었어?
“심상정. 그 사람을 좋아한다기보다 그나마 여성주의 정책을 이야기 많이 하고, 확실히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해. 사실 한국에서 여성주의에 국민의 호감도가 낮은 게 현실이잖아. 유력 정치인도 말을 아끼고 표를 얻으려고 오히려 성 소수자를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정도인데 이런 지형에서 그나마 심상정 후보가 올바르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 거 같았어. 궁극적으론 소수자였거나 약자였던 경험이 많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방향으로 힘을 실은 거야.”
―사실, 너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너도 너와 같은 사람이 소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 나와 같이 소수자를 위하는 목소리가 앞으로도 커지면 커졌지, 절대 작아질 거로 생각하지 않아. 내 모든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바꾸려고 현실에 참여하는 행위는 옳고, 이 옳은 행동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어.”
박근혜, 노력하는 20대를 좌절시키다
―촛불집회도 가봤겠네?
“한 번밖에 못 가봤어. 그간 주말엔 시간이 안 됐는데 그날은 시간이 됐어. 그냥 가야 했으니까 갔어. 이 사태가 잘못됐으니까 가서 내 목소리를 높이는 게 맞는 것처럼, 그냥 거기에 가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갔어. 그리고 거기에 페미니즘 단체들도 많이 갔거든? 같이 참가해서 조금이나마 목소리를 높이고 싶었어. 그런 페미니즘 단체가 소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
―사실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우리 삶의 크게 바뀌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극적인 변화는 아니더라도 소소한 변화는 있어. 최저임금이 바뀌면 우리는 몇 푼 더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영화를 한 편 더 볼 수 있고 그렇잖아. 우리가 생각하는 변화가 막 대통령이 바뀌는 순간 억만장자가 되는 아메리칸 드림은 아니라고 생각해.”
―박근혜 대통령의 어디에 크게 실망했어?
“믿음이 무너진 거야. 그간 노력해온 내 삶의 좌절이랄까. 사람들이 아무리 헬조선이라고 해도 내가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될 거라고 적지 않게 믿고 있었거든. 어느 정도 세상이 공정하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정유라나 최순실이나 하는 걸 보니, 그런 믿음이 총체적으로 무너졌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이 사회의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셈이야.”
―그럼, 대체 이 한국 사회의 근원적 문제점은 뭐라고 생각해?
“일단, 한국식 가부장과 유교 문화가 가장 큰 문제야. 이거 완전히 빙산이랑 비슷해. 빙산의 일각처럼,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의 표면을 뚫고 밑으로 내려가면 한국식 유교 문화가 있어. 한국 사회의 여성 차별은 거의 뭐 한국식 유교 문화에서 나온 거야. ‘여자니까 덜 받아도 돼’, ‘집안일 하면 되잖아’부터 서열 따지는 거나 나이 많은 사람이 이겨야 하고, 나이 어린 사람이 뭐라 한마디 하면 기어오른다고 하는 모든 문화가 한국식 유교 문화 때문이야.”
―집에서 당했나 보네?
“응, 내가 집에서 막내야. 근데, 친척 어른들한테 ‘넌 여자가 너무 신경질적이야’, ‘기가 세다’, ‘그러면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 ‘목소리가 너무 크다’ 그런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어. 사실 나도 그런 가해자 중 하나였어. ‘노출하면 안 된다’, ‘여자는 담배 피우면 안 된다’부터 ‘남자는 울면 안 된다’라는 말까지 비판 없이 받아들였어. 요즘은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서 반성하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말도 안 하려고 해.”
프로불편러의 꿈은, 프로불편러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
―소위 ‘프로불편러’의 입장에서는 어떤 정책을 바라?
“낙태죄 폐지로 시작해서 나아가선 낙태 합법화까지. 지금 낙태죄 폐지에서 웃긴 게 많아. 배우자의 동의까지 필요로 하는 거야. 대체 왜일까. 자신의 몸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봐. 원치 않는 아이면 지우는 게 맞다고 생각해. 출산과 낙태 둘 다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기 때문에 그 사람이 원하느냐 혹은 원치 않느냐가 중요하지 다른 건 큰 문제가 아니야.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애를 낳고 키우게 되면서 잃는 게 많아. 책임지는 게 많고, 포기할 것도 많단 말이야. 그러니까 더더욱 여성의 선택을 존중해야지.”
―네가 바라는 세상은 뭐야?
“오그라들어도 되나? 다들 평등한 세상. 소수자들과 약자들이, 내가 싸우지 않아도 되는 평등한 사회가 왔으면 좋겠어. 내가 주말마다 시위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고, 프로불편러가 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말이야. 서로가 차별하지 않고 서로서로 지우지 않는 사회. 그러니까, 영화 ‘스타트랙’ 같은 세상이 오면 좋겠어. ‘스타트랙’을 보면 성 소수자, 외계인 온갖 인종 등 다 나오잖아. 그런 ‘스타트랙’같은 세상이 내 이상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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