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수직적이다. 페이스북은 우리가 좋아했던 과거의 콘텐츠에 기반해 가장 유사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A의 글을 꾸준히 좋아한다면, A의 글이 계속 뜨며, A가 좋아요를 누른 글이 뜨게 된다.
그에 반해, 넷플릭스는 수평적이다. 우주를 소재로 한 ‘그래비티’를 좋아한다면, 같이 우주를 소재로 한 ‘인터스텔라’ 혹은 ‘스타트렉’을 추천한다. 우주를 소재로 했지만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 그리고 스타트렉의 메시지는 다르다. ‘무한도전’과 ‘1박 2일’이 비슷한 포맷이지만 세부 주제와 메시지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수직적 알고리즘과 수평적 알고리즘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필터 버블, 에코 챔버 등으로 상징되는 ‘보는 것만 보게 되는’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뉴데일리’를 좋아하면 ‘미디어워치’가 뜨고, ‘미디어워치’를 좋아하면 변희재가 뜬다. 그렇게 우리는 다양성과 멀어진다.
그에 반해 수평적 알고리즘은 공통되는 테마를 기반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기에 다양성을 보장한다. 그래비티에서 시작해 인터스텔라로 이어지고 스타트렉으로 이어지면 ‘종로의 기적’까지 나올 수 있다.
어느 것이 건강한 알고리즘인지는 확실하다. 편견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수직적 알고리즘과, 지평을 넓히는 수평적 알고리즘은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공급자가 정량적으로 평가해 콘텐츠를 제공하는 넷플릭스와 실시간으로 사용자가 콘텐츠를 제작하고 정량적 평가도 불가한 페이스북을 일대일로 비교하긴 어렵다.
우연찮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어떤 분의 게시물을 보았다. 그 게시물의 내용은 ‘페미니스트는 페미 노만 젓는 것도 힘드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였다. 이래라저래라에는 트렌스젠더, 게이, 비건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그 이야기도 작성자가 적당히 왜곡한 모양이었다.
작성자의 뜻을 100% 알 수야 없겠지만, 아마 비건들이 흔히 듣는 “그럼 식물은?”, “그럼 생선은?” 등으로 대표되는 비아냥거림에 착안한 듯하다.
그 사람의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따지지 않겠다. 다만, 미국에선 이미 트렌스젠더의 화장실 사용과 관련해서 치열한 논쟁이 오가고, 이 와중에 트랜스젠더들이 비트랜스젠더들보다 살면서 성폭력을 당할 확률이 높다는 조사가 나왔다. 그들도 현재 사회 구조의 피해자다. 게이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들의 목소리가 비아냥거림과 페미니스트들이 연대할 필요 없는 대상으로 치부될 이유는 없다.
운동 따위 하지 않은 나지만, 하나는 안다. 좋으나 싫으나, 미우나 고우나 약자는 연대해야 한다. 연대하는 와중에 다양한 논쟁이 있다. 노동 계급을 기반으로 한 구좌파스러운 운동과, 여성주의와 LGBT로 대표되는 최근의 운동 사이의 갈등은 연대 와중에 일어나는, 나름 건강하다 볼 수 있는 운동이다. 적어도 둘 사이에서 생긴 토론과 논쟁은 서로를 배제하자는 극단적 주장까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게시물은 진보적이지 않았고, 연대에 기반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분열과 배제 그리고 분리에 기반해 스스로의 기반을 키우려 했다. 자본의 대명사인 구글과 아마존이 오픈 정책을 펼치고, 트위터가 빅데이터든 뭐든 꿀을 빠는 이유도 그들의 개방성 때문이다. 폐쇄와 고립을 주창하는 그들은 얼마나 구식인가.
그렇게 서로를 배제하고 연대하지 않아서 성공한 사회변화가 무엇이 있는가. 비록, 청원에 가깝긴 했다만 광화문의 촛불은 각기 다양한 단체들이 자신들의 깃발을 갖고 와 서로 연대해 낳았다. ‘병신년’ 논쟁과 ‘닭근혜’ 논쟁 그리고 여성혐오적 표현에 대한 논쟁은 적어도 서로를 광장에서 배제하려 하진 않았다.
수직은 새로운 지평을 낳지 못한다. 수평은 새로운 연대를 낳을 수 있다. 조금씩 경계를 넓히고, 경계를 넓혀서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구식 체제가 낳은 견고한 성을 조금씩 허물기 위해선 어쨌거나 서로 손잡고 연대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고 진보를 논하는 사람들이 분리와 배제 그리고 분열에 기반해 운동하자는 걸 보면 당황스럽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 배제와 분열의 대상이 기존에 힘을 가진 기득권도 아니고, 같은 약자들이었다.
이해하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성을 지키고,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최대한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첫 번째는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다. 만나는 것의 반대는 배제다. 배제는 만남을 방해하며, 앎을 막는다. 결국,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구현모
알트 기획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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