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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사약의 과학, 혹은 정치학

구속영장은 사약이 아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문명국이다

2017.03.30(Thu) 09:15:31

[비즈한국]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기억하는가? 하이틴 소설 같은 제목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드라마였다. 정종(이민우)의 옷소매에서 역모와 관련된 문서가 나오자 수양대군(김영철)은 정종에게 능지처참 형을 내린다.

 

왕은 역모를 일으킨 신하를 능지처참할 때 반드시 다른 군신들이 참관하게 했다. 공포에 질려서 역모를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 심산이었던 것이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이란 머리, 몸통, 팔, 다리를 토막 쳐서 말 그대로 처참하게 죽이는 극형이다. 사지와 머리를 각각 줄로 묶은 후 머리를 묶은 줄은 기둥에, 그리고 사지를 묶은 네 개의 줄은 네 마리의 소에게 묶는다. 그리고 소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해서 팔과 다리와 머리가 몸통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떼어지게 해서 죽이는 방법이다. 능지처참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역모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능지처참은 일상적으로 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능지처참보다는 참수를 더 자주 행했다. 참수(斬首) 역시 능지처참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극형이기는 마찬가지. 영화에서는 망나니들이 기막힌 솜씨로 단칼에 목을 치지만 실제로는 서너 번은 쳐야 겨우 목이 떨어져 나갔다. 특히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즉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유교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신체를 훼손당하는 것은 커다란 불효였기에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형벌이었다.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絞首)는 신체를 훼손하지는 않지만 구경꾼 앞에서 죽이는 것이라 본인과 가문에 치욕적이었다. 현대에도 공개적인 처형과 신체 훼손 형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국가를 차마 문명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드라마 ‘장희빈’에서 희빈 장 씨가 사약을 받는 모습. 사진=SBS 방송화면 캡처


조선시대라고 해서 가혹한 처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공개로 진행하고 신체도 훼손하지 않는 근대적인 방식의 처형법도 있었다. 사사(賜死)가 바로 그것. ‘죽음을 은혜로 내려준다’는 뜻이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사약을 내리는 것이다. 사약은 사람을 죽이는 약, 즉 死藥이 아니라 왕이 하사한 약, 즉 賜藥이다. 사사할 때 약만 내려 보낸 게 아니라 목을 매달 수 있는 광목도 함께 보냈다.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또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보통은 약을 먹는 죽음을 택했다. 사약을 내리는 것은 왕이 신하에게 표현하는 마지막 은총이기도 했다.

 

형벌의 방식이 어떠하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흔히 드라마에서는 왕이 계신 궁궐 방향으로 큰절을 올리면서 사약을 들이키지만 억울한 마음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강제적으로 들이킨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드라마 ‘장희빈’에서 의금부 관리들이 장희빈(김혜수)의 양팔을 잡은 뒤 막대로 입을 벌려 사약을 들이붓는 장면은 유명하다. 장희빈이 눈알을 부라리며 “나를 죽이려거든 세자와 함께 죽이라”는 대사는 아직도 내 귀에 선하다. 드라마에서 장희빈이 “마지막으로 세자를 만나게 해달라”며 흐느끼다 고개를 떨구기까지 무려 10분이나 걸렸는데 이때 보여준 김혜수의 연기는 최고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이 옥의 티라고 지적했다. 원래 사약을 먹으면 즉시 피를 토하면서 죽는데, 10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정반대다. 이런 지적을 하시는 분들은 그동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다. 입으로 들어간 사약이 위장에서 흡수되고 독작용이 일어날 때까지는 보통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피를 토하는 일도 없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 폐비 윤 씨가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한 모습. 그러나 사약을 먹는다고 피를 토하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 사진=SBS 제공


사약의 재료는 국가비밀이었지만 학자들은 부자(附子), 비상(砒霜), 천남성(天南星) 등이 사약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부자는 투구꽃(Aconitum jaluense)으로 만든다. 꽃에 들어 있는 알칼로이드 성분인 아코니틴(aconitin)은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비를 막는다. 아세틸콜린이 부족하면 근육이 마비된다. 비상도 비슷하다. 비상(As2O3, 삼산화이비소)은 중추신경 마비제다. 한꺼번에 치사량 이상을 먹으면 한두 시간 안에 신경이 마비되어 죽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분명 고통이다.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을 때 입천장을 긁어내고 마셨다. 약의 흡수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다. 단종은 사약을 마신 후 군불을 땐 온돌방에 누워 있었다. 약 기운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21세기에 사약을 다시 거론하는 까닭은 지난 3월 27일 춘천 출신의 한 국회의원이 지난 10일 파면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한마디로 참담하다. 나라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궁궐에서 쫓겨나 사저에서 눈물로 지새우는 여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격”이라며 애틋한 심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전후 사정 모르고 단순히 말만 들은 사람은 아마도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군왕에 대한 충신의 간절한 마음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김진태 의원​은 “궁궐에서 쫓겨나 사저에서 눈물로 지새우는 여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격”이라고 말했다. 사진=비즈한국DB


춘천 출신 국회의원의 표현에서 크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궁궐에서 쫓겨난’이란 문구다. 대한민국 궁궐은 모두 문화재다. 따라서 지금 궁궐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청와대를 궁궐에 비유할 때는 ‘구중궁궐 안에 깊숙이 갇혀 있어서 여론에서 동떨어져 있는’ 대통령을 비꼴 때뿐이다. 10일에 파면된 박근혜 씨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비선실세에 휘둘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파면의 핵심 이유였다. 이런 점에서 지역구가 춘천인 검사 출신 국회의원은 정확한 표현을 했다.

 

하지만 모든 표현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우선 ‘사저’라는 표현이 틀렸다. 사저는 관저를 전제로 한다. 관저가 없는 사람에게 사저라는 표현은 온당치 못하다. 그냥 ‘집’이라고 하면 된다. 결정적인 오류는 ‘사약을 내리는 격’이라는 부분이다. 사약은 조선시대 왕이 신하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 남았을 때 내리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왕이 없다. 헌법 제1조에 따르면 주권자는 국민이다. 그런데 국민은 파면된 대통령에게 그다지 애정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품격 있는 처벌을 내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문명국가인 대한민국은 모든 처벌을 내릴 때도 인권을 존중한다.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을 사약을 내린 것에 비유해서는 안 된다. 단지 의금부로 압송해달라는 표현일 뿐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젠 구속되어도 칼을 씌우거나 주리를 트는 일은 없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문명국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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