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가을 어느 날. 일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도시락 가방에서 음료수 캔을 몇 개 꺼내놓으신다. 어떤 방문객이 수고하신다며 몸에 좋은 거니 드시라고 했다는데, 그걸 또 혼자 드실 수 없어 집으로 가지고 오셨나보다. 아버지를 생각해준 그 방문객의 마음이 고맙고, 가족을 생각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또 고마워서 조심스레 받아들고 우선 냉장고에 넣었다.
그런데 이 음료수, 뭔가 낯설다. 푸른 빛의 캔이어서 탄산음료 종류인 줄 알았는데 겉에 ‘수소수’라고 쓰여 있다! 아, 이건 또 무슨 사이비 느낌 충만한 제품인가 싶어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며칠 후 목이 말라 잠이 깬 밤에 마셔는 보았다. 맛은? 뭘 기대하겠는가, 그냥 물맛이다. 며칠 동안은 수소수를 좀 더 사서 마셔보겠다는 아버지를 말리느라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내게서 수소수는 잊히는 것 같았다.
지난 1월 말에 어느
웹툰이 SNS와 인터넷커뮤니티 과학게시판 등에서 한 차례 인기를 끌었다. 공대생 주인공의 갑갑한 심정이 제대로 느껴지는 웹툰이었다. 웹툰의 소재로 다루어지고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걸 보니 정말 수소수가 시장에서 제법 팔리는 건가 싶어서 뉴스를 검색해보았다.
지난해 10월 신문기사를 보니 한 회사의 제품만 한 달 사이에 매출이 60% 증가했다고 하고 일본의 수소수 시장은 연간 6000억 원대 규모라고 한다. 잠깐 검색을 더 해보니 미국에서도 제법 팔리는 모양인지 실제로 효과가 있느냐는 질문과 답글이 많이 보이고 각종 광고 사이트들도 많이 보인다. 세상에, 맹물이 이렇게 많이 팔린다니!
예전부터 물을 가지고 각종 이름을 붙여서 비싸게 팔아먹는 경우는 많았다. 육각수, 자화수, 이온수, 알칼리수, 산소수…. 그 어느 것도 업자들이 내세우는 효능과 효과를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근거가 거의 없는 것들이다. 얼마나 많은 ‘~물’과 ‘~수’ 들이 있는지, 은퇴한 화학과 교수인 Stephen Lower가 이런
엉터리 과학으로 팔아먹는 물의 목록을 정리한 걸 보면 읽기가 벅찰 정도이다. 이런 각종 ‘~물’의 광고대로라면 이미 전 세계 의사와 약사 들은 실직했을 것이고 전 인류는 무병장수, 아니 어쩌면 불로장생의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주에서 가장 흔한 수소는 다른 원자들과 결합하여 여러 물질을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면 수소 분자, 수소 양이온, 수소 음이온, 수소 원자 등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수소 분자는 쉽게 말하면 수소 기체이다. 매우 가벼워서 비행선을 띄우는 데 사용한 적도 있었고, 불에 붙어 폭발하기 쉬운 성질을 가졌다. 실제로 1937년 독일 비행선 힌덴부르크호의 폭발 사고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나기도 했다. 수소 양이온은 용액에 많이 녹아 있을수록 강한 산성용액이 되므로 산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수소 원자나 수소 음이온은 자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이내 다른 물질과 반응하는 성질 때문에 몸에는 위험할 수 있다.
몸에 안 좋은 것, 산성 용액 만드는 것 빼고 나면 수소수에 사용되는 것은 수소 기체만이 남는다.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제한된 조건에서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들이다. 게다가 수소 기체가 물에 녹는 양은 1리터에 1mg이 조금 넘는다. 온도에 따라 기체의 용해도가 달라지지만 대강 따져보아도 물 2리터를 마셔봐야 겨우 3mg 정도의 수소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셈이다. 콜라를 마실 때를 떠올려보라. 칙! 하고 뚜껑을 여는 순간부터 이산화탄소 기체가 쏟아져나오고 트림으로도 나와버리는 것처럼 3mg이 모두 몸 속으로 흡수된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맹물과 다름없다. 열심히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건 수분을 충분히 섭취한 때문이거나 건강해졌으리라는 믿음에 의한 효과일 뿐이다. 그저 깨끗한 물이면 충분한 일이다.
그나저나 봄맞이 청소를 하며 아버지의 수납장을 정리하다 보니 웬 쪽지가 한 장 나온다. 이번에는 또 어느 광고를 보셨는지, 아니면 또 엉터리 TV 건강프로그램을 보셨는지 이름 모를 풀뿌리들을 달여 먹으면 이런저런 수많은 병에 다 좋다는 메모가 적혀 있다. 아, 이번에는 또 며칠을 설득해야 하나. 속이 타고 목이 마른다. 누가 물 좀 주소.
정인철
사이언스커뮤니케이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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