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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통영여행 1: 예술과 어우러진 그림 같은 미항

최근엔 벽화마을로 젊은층 유입…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등 흔적 곳곳에

2017.02.03(Fri) 17:27:32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 가운데 광역시 규모가 아님에도, 그래도 2박 3일 정도는 들여야 조금 ‘열심히’ 봤다고 소리 들을 만한 곳을 들라면 그 으뜸에 통영을 꼽고 싶다. 많은 이들이 몇 차례나 찾아도 지루함 없이 머물 수 있다고 말하는 곳도 통영이다. 흥겨운 뭔가가 있는 것도, 지루할 틈 안 주려는 사명감에 불탄 테마 파크가 있는 것도, 세련된 쇼핑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처음 통영(당시는 충무시)을 찾은 이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오히려 별반 달라진 게 없다시피 한 곳이다. 달라진 게 없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그 어릴 적부터 그 이후로 줄곧 통영을 찾았을 때마다 눈과 마음이 아늑해지는 풍경, 충무김밥을 입에 넣었을 때의 그 중독적인 달큼함.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통영을 찾아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바다를 바라보며 팔로 감싸 안은 듯한 항구와 마을

통영 여정의 시작은 통영항에서 시작했다. 통영항이라 하면 보통 주변 섬 등으로 향하는 배들이 출발하는 통영여객터미널 일대 서호동의 항구와, 여기서 동쪽으로 이웃한 중앙동의 항구를 모두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몇 번을 찾아도 여전히 발길이 오래, 더 먼저 머무는 곳은 여객선이 오가는 분주함 없이, 크고 작은 어선들이 도로와 바투 들어 앉아 바다와 도시의 경계를 배들이 지어 주고 있는 이 중앙동의 항구이다.

뭔가에 베어 먹힌 듯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와 앉은 통영 항구. 덕분에 육지는 더 가깝고 파도는 잔잔하다.


이곳은 특별히 ‘강구안’이라고도 불린다. 바다가 육지로 밀치고 들어온 것인지, 육지가 바다에게 덜렁 제 자리 내어준 것인지 항구는 마치 뭔가에 베어 먹힌 듯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다. 그러다 보니 육지는 더 가깝고 파도는 잔잔해 이만한 항구 명당이 또 없겠다 싶을 정도이다. 항구를 따라 시장과 꿀빵 가게, 충무김밥 가게들이 어깨를 이어간다. 충무김밥집이 유난히 몰려 있는 부두에는 거북선 모형이 정박되어 있는데, 안팎을 꽤나 생생하게 재현해 만들어 놓아서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기에 좋다. 철갑을 두른 배가 어떤 구조였고, 어떻게 포를 쏘고 노를 저었는지 백 번 이야기 하는 건 이 배에 한 번 오르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 강구안을 따라 걷다 보면 구름과 하늘색이 고스란히 반사되는 맑은 바다와 그 위에 뜬 배들, 그리고 완만한 언덕을 그려가며 뻗은 사람의 도시가 ‘그림 같다’는 상투적인 수식을 절로 튀어나온다. 왜 이곳을 두고 한국의 나폴리며, 아말피 해안이며 하는 비유를 아끼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풍경이다.

바다를 향한 풍경을 더 시원하게, 그리고 통영 강구안 일대와의 어우러짐을 볼 수 있는 곳은 동피랑이다. 강구안에서 ‘동쪽 절벽(혹은 언덕)의 마을’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원래 통영항 최고의 뷰 포인트로 오랜 시간 사랑받아왔다가 ‘벽화 마을’이 되면서 통영 여행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을 주민보다 골목길을 오가며 벽화에 기대 사진을 찍는 여행객의 수가 훨씬 더 많아진 지 오래다. 옛 항구 마을의 조악한 길과 소박하다 못해 아슬아슬했던 담벼락이 멋스러운 예술마을길로 바뀐 것이다. 이를 두고 딱히 좋다고만 바라볼 수는 없지만, 통영을 젊은 사람들도 즐겨 찾는 ‘여행지’로 대접받게 한 주력이었음은 인정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뷰 포인트로 사랑받아온 동피랑은 벽화가 조성된 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여행지가 되었다.


동피랑 마을을 찬찬히 올라가며 벽화에 눈길을 주고, 동시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는 항구 마을 사람들의 거친 담벼락이며 문설주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며 동피랑의 언덕을 오른다. 저 아래로 강구안의 풍경이 시원하다. 바다도 넓고 멀다. 조밀조밀 어깨 맞닿아 정박한 어선들이 도심의 항구라는 걸 잊을 만치 아늑하고 고요하다. 사람의 손으로 그려낸 벽화로 어우러진 마을도 좋다지만 이 순간 눈앞을 가득 메운 이 풍경에 비할 것은 아니다.

항구의 골목과 거리에 채워진 전통과 예술의 발자국

동피랑을 내려오면 통영 곳곳의 들러볼 만한 곳들을 본격적으로, 차근차근 짚어가게 된다. 임진왜란 후 한산도에 있던 수군통제영을 옮겨 오며 객사 건물을 지은 뒤 ‘은하수를 가져와 피 묻은 병기를 닦는다’는 뜻을 담은 이름의 세병관과 통영여객터미널에서 머지 않은 곳, 일제가 물자 운반을 위해 만든 해저터널 등 역사의 현장이 즐비하다.

통영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와 예술, 전통 공예의 도시이기도 하다. 전통 놀이극인 통영오광대와 누구도 따라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나전칠기 공예의 원조가 바로 통영이다. 그리고 통영 출신 혹은 통영에 머물렀던 예술가들의 이름을 짚어가기 시작하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세계가 주목한 거장 윤이상 선생이 통영에서 태어나 이곳의 풍경을 선율에 담았고(도천동에 윤이상기념공원(도천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고향 통영의 사람과 공간 들을 숱한 작품들에 녹여 냈다.

강구안을 바라보는 남망산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자리는 통영에서 나고 자랐거나 머물렀던 예술가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감성의 충만을 경험했던 곳으로 알려진다. 통영의 언덕배기 마을을 천천히 거닐다 저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와 도시의 풍경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들의 예술적 감수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는 그런 ‘전망 좋은’ 목이다.

박경리기념관에 전시된 작가의 육필 원고.


많은 예술가들이 통영에 머물렀던 이유에는 한국전쟁이 무관하지 않다. 이중섭의 예가 그렇다. 지금도 항남동 길가에 여전한 옛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이중섭의 집은 전쟁 중 통영에 피난 온 뒤 정착하다 걸작 ‘황소’를 남긴 그의 예술적 둥지였다. 일제 강점의 암흑기를 견뎌온 예술가들에게 한국전쟁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파괴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런 그들의 영혼이 쉼을 위해 잦아들거나 혹은 잠깐의 피난이 오랜 머묾으로 이어졌다는 것만 보더라도 감성의 치유를 안겨준 통영의 가치는 충분히 빛난다.

남망산 조각공원과 윤이상기념공원을 비롯해 통영에서 태어났거나 머물렀던 예술가들의 흔적은 도시 곳곳에서, 특히 항구를 중심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청마 유치환을 기리는 청마 문학관, 그리고 그의 삶과 사랑을 상징하는 시 ‘행복’에 등장한 중앙동 우체국 일대 200m 거리를 따라 조성된 ‘청마 거리’ 등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아내가 있는 몸이었지만 통영여중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조 시인 이영도를 향해 20년간 구애의 편지를 보낸 그의 이야기가 이곳에 스며 있다. 우체국 창문 앞에서 편지를 쓰던 시인의 모습은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니 지금이라도 ‘행복’을 꼭 한 번 다시 읽어 보시길. 같은 도시에, 그것도 항구를 따라 걸으면 온 동네 사람을 다 만날 것 같은 통영의 도심에 머물면서 편지로 연시를 주고 받았고, 그렇게 오간 편지가 5000여 통에 이른다는 사실을 뭐라 해야 좋을지 딱히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이 비현실적인 사랑 덕분에 통영은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온 여행자들로 넘치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학 여행지로 사랑받게 되었다. 청마 거리에서 이어진 골목은 초정 김상옥을 기념하는 ‘초정 거리’인데, 이 골목 한 어귀의 일본식 2층 가옥이 그의 생가이다. 그 밖에 박경리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의 생가나 흔적은 강구안과 중앙동 일대에 두루 자리하고 있다.​ 

(2편에 계속)

남기환 여행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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