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대여계좌를 썼다 ‘먹튀’를 당했습니다. 쓴 건 제 잘못이라고 해도, 신고해도 단속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넘쳐나는 대여계좌에 대한 피해자의 토로다. 대여계좌는 지난 2014년 ‘적격 개인투자자 제도’가 도입되며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매수전용계좌가 있던 시절 옵션매수는 증거금이 필요하지 않았고, 규제 도입 전에는 기본예탁금이 1500만 원에 불과했다. 2014년 적격 개인투자자 제도 시행부터 선물은 3000만 원, 옵션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5000만 원의 기본예탁금이 필요하다. 여기에 30시간의 온라인 교육, 50시간의 모의거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금융당국이 이 같은 규제를 만든 취지는 국내 파생상품 시장이 생긴 지 수년 만에 세계 최대 거래량을 자랑하는 선물·옵션시장이 됐기 때문이다. 위험성이 높은 선물·옵션투자로 인해 개인의 피해가 크다고 보고 투자자 보호라는 취지로 규제를 신설했다. 하루 수백 배 수익도 가능하지만 순식간에 ‘깡통 찰’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선물·옵션의 진입장벽을 높여 일정수준 이상의 지식과 자금을 가진 투자자만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도입 취지는 좋았으나 규제로 인해 대여계좌라는 음성적 시장이 커졌다. 대여계좌란 거래에 필요한 기본예탁금을 단돈 몇 십만 원만 있어도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투자금이 100만 원이라면 5000만 원의 기본예탁금을 빌려주고 100만 원 이상 손실이 나기전에 자동으로 손절한다.
불법 대여계좌는 증거금이나 거래승수 기준이 없어 소액으로 투자하는 투자자를 유혹한다. ‘도박판’으로 향하는 걸림돌을 계좌 대여라는 방식으로 우회하게 해준다. 선물·옵션은 증권사에서 정상적으로 거래를 하더라도 선물은 7배, 옵션은 100배 이상의 레버리지 효과가 있다.
여기에 추가 레버리지를 일으키다보니 사실상 수백 배 이상의 레버리지를 쓴다. 대부분의 투자자는 ‘한방’을 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불법대여계좌를 찾는다. 하지만 수백배의 레버리지를 쓴 결과는 비참할 수밖에 없다. 한 선물·옵션 전문가는 “소액으로 대여계좌를 빌려 선물 투자하는 사람은 100% 도박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여계좌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법이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에서 광고까지 하는 데도 제대로 규제를 하고 있지 않다. 당국의 대안없는 규제가 불법 대여업체의 난립을 부추겨려 힘없는 소액투자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대여계좌를 사용한다는 한 투자자는 “증권사 계좌를 쓰다가 손실이 커졌다. ‘한방’으로 복구할 욕심에 대여 계좌로 들어왔는데 7년째 못나가고 있다”며 “대여계좌에서 출금이 늦어지면 조마조마해진다. 그럼에도 실제 계좌는 증거금 등 여러 부담이 커 어쩔 수 없이 대여계좌를 쓴다”고 말했다.
대여계좌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여계좌를 이용하는 투자자 중 ‘먹튀’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대여계좌가 불법이기 때문에 수사나 추적의 낌새를 느끼면 폐업과 동시에 투자자의 돈을 들고 사라진다. 투자자 대부분이 돈을 잃지만 만에 하나 대박을 터트리기라도 하면 투자수익을 주는 대신 잠적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대여계좌를 쓰다 먹튀를 당했다는 한 피해자는 “총 거래는 3000만 원 정도 됐다. 간혹 출금이 느리긴 했지만 의심을 안 했는데 서버 고친다는 핑계로 버벅거리다 연락이 끊겼다”며 “나 같은 피해자가 있을 수 있어 금감원에 신고했지만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증권사에 연동돼 실제 주문이 이뤄지는 대여업체는 그나마 양심적인 경우다. 증권거래 정보시세만을 이용해서 가상으로 투자하는 대여계좌는 더 큰 문제다. 대여업체에 A 선물을 매수하면 대여업체는 실제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온 결과로 돈을 주는 방식이다. 실제 거래체결 없이 가상으로 만든 시스템 안에서 운영된다는 점은 사설경마 방식과 비슷하다. 모의대여계좌는 실제 거래 내역조차 남지 않기 때문에 적발이나 단속은 어렵다. 거래내역도 없는 터라 먹튀 가능성은 더 높다.
대여계좌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감시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앞서의 투자자는 “대여업체 홈페이지를 링크해 거래소, 금융감독원, 검찰에 직접 신고 넣어보라. 콧방귀도 안 뀐다. 포털 사이트 운영사에 신고해도 아무 의미 없다”며 “증권거래소는 대여업체는 관할이 아니라고 하고, 금감원은 정식 금융법인이 아니라 관할이 아니다, 검찰은 다시 거래소나 금감원으로 신고하라며 돌리기에 바쁘다”고 하소연했다.
오히려 대여계좌 때문에 애꿎은 계좌만 색출한다는 하소연도 들린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거래소에서 대여 계좌를 색출한다며 진짜 고객들이 직접 매매하는 계좌를 대량으로 색출해 억지 혐의로 계좌 폐쇄되는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동시접속하거나 출금이 잦은 계좌를 우선적으로 색출해서 대여계좌라고 계좌폐쇄를 권고하는데 고객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억울한 경우가 많다”며 “모의계좌로 대여업체를 운영하는 불법대여업체는 놔두고 증권사 계좌들만 강력하게 단속하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모의계좌의 폐해는 알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공권력이 미치기 힘든 곳도 맞다”며 “거래소나 금감원 등 관할이 애매한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더군다나 검찰이 달려들기에 대단한 사건도 아니기 때문에 관심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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