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의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PT) 이후 기업들의 신제품 발표회는 단순히 보도자료를 돌리고 밥 한 번 사는 행사가 아니라, 잘 꾸며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처럼 진화하고 있다. 1월 17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3세대 ‘모닝(Morning)’ 신차발표회에서 보여준 기아자동차의 PT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김영란법 시행 이후 신차발표회는 간소화되는 추세다. 과거 특급호텔에서 할 때는 발표 자체보다 식사 대접 목적이 컸다. 지금은 메뉴보다는 행사 자체에 공을 들이는 모습니다. 이날 식사는 DDP 인근 식당 두 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식권이 배포됐다.
10여 년 전 현대기아차의 신차발표회는 행사에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기사만 잘 나가면 되므로 기자들에게 크게 한 번 베푸는 게 주목적이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매체들이 페이스북 라이브로 현장 중계를 하고, 신차발표회 모습을 유튜브에도 올리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이런 이유로 이날 신차발표회는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한계도 보여줬다.
# ‘잡스’ 스타일 시도했지만 원고 낭독 방식은 그대로
우선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려운 부분은 아니다. 신차 판매용으로 브로셔, 카탈로그, 인터넷 사이트, TV 광고 등을 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면 된다. 국내 정상급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화면은 화려했다. 또한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문제는 발표자였다. 과거에는 화면을 띄워놓고 연단에서 자료를 소리 내어 읽는 수준이었지만, 이날 발표자들은 모두 무선마이크를 이용해 무대 한가운데에 올라 발표를 했다. 리시버는 주머니에 넣고 마이크는 얼굴에 붙이는 방식이었다. 무대 전체를 활용하고, 두 손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발표자들은 무대 한 가운데 서서 관객석 맨 뒤에 설치된 스크린의 자막을 낭독할 뿐이었다.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이는 박한우 기아자동차 사장. 환영사를 시작한 그는 무대 한가운데 서서 계속 관객석 가운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무대 앞의 기자가 뒤돌아서 스크린의 자막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자, 이를 의식한 듯 박 사장은 그제야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이는 기아디자인센터 박한용 팀장이었다. 디자인 분야를 설명하는 순서답게 화려한 이미지들이 화면을 차례로 장식했다. 그러나 그를 발표하는 박 팀장은 무대 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앞서의 박 사장과 다른 점은 그나마 위치를 이동하고 몸의 방향을 바꾸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시선은 계속 자막을 향했다.
세 번째로 상품성에 대해 발표한 소형PM센터 전삼기 상무의 순서에서는 중간에 자막이 갑자기 꺼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막이 곧 뜰 것으로 기대한 전 상무는 약 10초가량 얼음이 된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럼에도 자막이 뜨지 않자 “자막이 나오지 않아 잠시 양해 말씀을 구한다”고 한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와 A4 용지의 대본을 들고 다시 무대에 올랐다. 서류에서 본인의 순서를 급히 찾는 동안 다시 자막이 들어왔다. 무선마이크를 차고 무대에 올랐음에도 그는 어색하게 종이뭉치를 든 채 정면을 바라보며 자막을 읽어갔다.
# 개발 콘셉트는 ‘무조건 스파크(한국GM)보다 낫게’?
전 상무의 PT는 시종일관 ‘경쟁사 S모델’과 자사 차량을 비교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실내공간, 연비, 가격, 회전반경, 내비게이션, 오디오 등 거의 모든 항목이 모닝과 ‘S모델’을 비교하는 화면으로 채워졌다. ‘경쟁사 S모델’은 한국GM의 스파크로, 모닝과 함께 국내 경차 시장 1위를 다투는 모델이다. ‘뭐가 됐든 스파크보다 무조건 낫게’라는 점이 개발 콘셉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내 시판되는 경차 모델은 3가지로, 모닝, 스파크 외에 기아차 ‘레이’가 있다. 그러나 레이는 모닝보다 약 100만 원(자동변속기 기준) 이상 비싸 시장을 주도하는 모델은 아니다.
네 번째 순서를 맡은 서보원 국내마케팅실장은 기아차 내에서는 PT를 잘 하는 편에 속한다. 어색한 억양으로 자막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애드립(ad lip)을 추가해 청중에게 얘기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목소리도 가장 크고 발음도 명확했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대여섯 명의 기자들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장 앞줄, 사회자와 가장 가까이 앉은 기자는 계속 손을 들었으나 질문 순서를 얻지 못했다. 사회자가 “질의응답 시간을 마치겠다”고 하자 그 기자는 “처음부터 계속 손을 들었는데 왜 기회를 주지 않는가”라고 따졌다. 사회자는 “다른 분들도 처음부터 손을 들었다”고 답한 뒤 “시간 관계상 마치겠다”고 마무리했다. 양해를 구하기보다는 질문자를 난처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질 수 없다’는 듯 그 기자가 무대의 임원들을 향해 “제발 기회를 달라”고 했고, 청중석의 기아차 임원도 “순서를 주지”라고 했지만, 끝까지 사회자는 그 기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자 기아차 임원 두 명이 그 기자에게 급히 달려가 “끝나고 제가 답변해 드리겠다”며 무마하기도 했다. 질의응답 순서가 끝난 뒤는 언베일링과 포토세션으로 이어졌다.
# 세련된 브랜드 정체성 보여줄 기회 놓쳐
무대가 좌우로 열리자 비보이의 춤에 이어 신차가 등장했다. 깜찍한 디자인과 컬러풀한 색상을 자랑하는 모닝 신차를 딱딱한 ‘아저씨 정장’을 입은 직원이 몰고 나오는 장면 또한 차량의 콘셉트와 맞지 않았다. 운전에 능숙한 직원이 담당하는 것은 맞지만, 복장에 조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어 보였다. 구매자의 많은 비중을 차지할 젊은 여성이 두 대 중 한 대를 운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다.
이번 신차발표회에서 ‘신차’가 아닌 ‘발표회’라는 행사에 포커스를 맞추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기아차 직원들이 만든 PT 화면은 화려했지만, 임원들의 국어책 읽는 듯한 발표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함이 묻어났다. ‘차만 좋으면 된 것 아닌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이런 행사가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로 전파된다. 이런 모습들이 기아차의 브랜드 이미지로 이어진다. 임원들이 사전에 PT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은 이미 상향평준화되어 있다. 현대기아차 제품이 ‘싸고 좋은 차’라는 이미지를 뛰어넘어 고객충성도를 갖추려면 세련되고 전문가적인 기업문화를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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