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크리에이티브의 발전소다. 책을 읽는 일, 독서는 인류 진보의 엔진 구실을 해왔다. 독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류사의 속살과 거기서 보이는 인간 욕망의 맨얼굴을 만나게 된다. 지식과 정보를 독점해 권력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은밀하게 역사의 부피를 키워온 이들은 독서를 범죄시했지만 독서에 의해 파멸을 맞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독서는 정보나 지식, 나아가 지혜를 주고받는 창구다. 독서 행위는 책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종이에 인쇄된 책 이전에도 책의 역할을 한 것들은 있었다. 심지어 문자를 전제로 해야 가능한 독서 행위 이전에도 책의 기능은 있었다. 지혜로운 자의 생각이나 경험 많은 이의 정신 자산을 공유하는 일, 정신 소통의 방법은 그림이었다.
선사 시대 동굴 벽화는 사냥의 지침서였고, 수렵 생활을 하는 구석기인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되는 일종의 독서 행위였다. 그림을 읽어냄으로써 사냥의 방법이나 정보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신의 영역에다 인류 정신을 맡겼던 고대에도 자연 만물을 빗댄 그림 문자가 독서의 창구였다.
이후 문자가 발명되면서 보다 적극적인 독서의 방식을 가능케 했다. 종이가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편편한 돌이나 대나무로 책의 기능을 대신해왔다. 서양 문명의 본격적인 시작점인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책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책은 특권층의 별난 사치였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은 책의 대량 제작을 가능케 했고, 지식의 대중화를 이루어냈다. 결국 인류를 야만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다시 무한한 창조력의 세상으로 이끌어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야 시작되었고, 그 이후 대략 200년 사이 인류는 엄청난 진보를 이루어냈다. 바로 책의 힘으로.
이처럼 책은 인류사를 풍요롭고 다양하게 만드는 텃밭 구실을 한 셈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다양한 가치와 생각이 공존하는 이 시대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창조력이다. 그리고 창조력을 충전하는 곳이 바로 책이다. 이러한 책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작가가 고기범이다.
그는 책이 보여주는 정보와 지식은 물론 인류사의 모습이나 역사적 사실, 종교 그리고 자신의 생활적 단편들까지 소재로 삼고 있다. 책에 담긴 지식이 실생활에서 쓰일 수 있다는 믿음을 다양한 방법의 작업으로 보여준다. 즉 책이 인류를 이끌어온 동력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창조력의 산실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독자적으로 고안한 기법으로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그리는 것이 아니다. 만든다. 다양한 회화 재료와 건축 자재 혹은 일상 용품 등을 활용해 책의 성격을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그림으로 제작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평면이 아니다. 보이는 이미지들은 회화적이지만 배치된 모습을 보면 조각처럼 느껴진다. 조각과 회화의 중간 지점이다. 따라서 고기범의 작업은 부조적 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전준엽 화가·비즈한국 아트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