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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정유라 파카’의 과학

이누이트족 의상을 미군이 대중화…얼굴 가린 정유라 모자는 보온기능 떨어지는 ‘멋내기용’

2017.01.12(Thu) 17:23:21

승마밖에 모른다던 한국의 어느 젊은이가 덴마크에서 지난 4일 체포되었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와 주변 인물들의 행실과 관련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가 덴마크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이 언론에 등장하자 일부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그의 옷이다. 유명 상표의 비싼 옷이라는 것이 화제가 된 이유였지만 가격이나 상표가 아니라 끝을 털로 장식(?)한 모자가 달린 겨울 외투, 즉 파카(parka)가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이다.

 

정유라 체포 장면. 사진=JTBC ‘뉴스룸’ 캡처


몇 년 사이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파카는 북극 가까이 사는 이누이트 족의 전통 의복이 그 원형이다. 이누이트 족의 옷이라고는 했지만, 북유럽부터 아시아 그리고 북아메리카까지 북극 가까이 사는 여러 부족의 옷이 다 비슷한 모양을 보인다. 가죽과 털을 주재료로 하고 품은 넉넉하며 아래로는 엉덩이를 덮을 만큼 길다. 방수를 위해서 생선 기름을 바르기도 한다. 그리고 모자와 소매 등의 끝부분에 털을 두른 파카는 동물 가죽이라는 뜻의 네네츠 족의 말로부터 온 것이다. 

 

파카가 대중에게 익숙해진 계기는 미군이 겨울 외투로 파카를 사용하면서부터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몇몇 형태의 파카가 군용으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민간인에게도 조금씩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민간시장에 흘러나온 군복은 가격이 싸고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저항문화의 한 상징으로 여겨진 때도 있었다. 전쟁, 미군 주둔, 징병제의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값싸고 튼튼한 옷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현재 생산되는 파카들은 미군의 N3B파카를 그 원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

 

미군용 N3B 파카. 사진=위키피디아


그런데 충전재나 옷감 또는 털 등을 다양한 소재로 바꾸고 디자인을 조금씩 개선하였다 해도 현대의 방한외투가 전통 파카의 성능을 일찍 뛰어넘은 것은 아닌 듯하다. 1995년의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캐나다의 학자들이 낸 논문에 따르면 순록 가죽으로 만든 이누이트 전통 파카와 캐나다군의 방한외투, 그리고 극지탐험용 방한외투의 성능을 비교한 실험이 있었다. 영하 28℃의 실험용 챔버에서 시속 20킬로미터의 바람을 맞는 상태에서 세 종류의 옷을 입고 피부와 심부 체온을 측정하였는데 결과는 이누이트 파카의 성능이 가장 좋았다(실험에 자원한 대학생들에게 박수를!). 이후에 더 좋은 제품들이 나왔다 하더라도 전통 파카의 우수성을 알려주는 연구임엔 틀림없다.

 

전통 파카의 보온 성능이 물개나 순록 가죽과 같은 단열기능의 소재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품이 넓게 디자인되어 몸과 접하는 부분에 공기층을 만들어주면서 땀도 어느 정도 배출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또 있는데 바로 모자와 소매 등의 끝 부분에 달리는 털이다. 옷의 안쪽 부분도 아니고 끝부분에 달린 털이 피부와 접할 때 따스한 촉감을 주는 것 이외에는 보온에 딱히 큰 역할을 할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는다 하더라도 얼굴은 차가운 공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영하 20도에서 바람이 시속 45킬로미터로 분다면 30분 정도만 피부가 노출되어도 동상에 걸린다고 한다. 이 정도면 이누이트 족에겐 흔한 날씨일 텐데 동상이나 저체온증의 위험에서 보호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모자 끝의 털인 것이다.​ 

 

파카를 입은 네네츠 족 어린이. 사진=EBS 홈페이지


모자 끝의 털은 다양한 길이와 방사상의 형태로 달린다. 이 털들이 모자 주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흩뜨려서 모자에 인접한 공기층(어려운 말로 경계층Boundary Layer이라 한다)의 두께를 두텁게 하고 얼굴 근처의 공기를 머물게 만든다. 이렇게 두터워진 인접한 공기층은 얇은 공기층일 때보다 피부로부터 열을 덜 빼앗아 가므로 동상의 위험이 줄어든다. 또 모자의 뒷부분은 품을 넉넉하게 해서 모자와 뒤통수 사이에 따뜻한 공기층을 유지시킨다. 표면의 거칠기나 요철로 인한 인접한 공기층의 변화는 비행기의 날개나 골프공의 딤플 등에도 적용된다. 이 경우에는 공기 저항을 줄이는 것이 목표이지만 모자의 털은 공기층으로 보호막을 만드는 차이일 뿐이다.

 

단순한 느낌이나 멋으로서만 모자의 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인조 털로 만들어진 제품들도 많으므로 애꿎은 동물의 희생 없이도 따뜻한 겨울을 지낼 수 있으니 털 달린 파카도 한번 고려해보시라. 정작 지구온난화로 유례없이 따뜻한 겨울이긴 하지만.

 

덧. 전통 방식의 파카 모자는 얼굴 앞부분을 노출하는데 이는 시야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모자에 입김으로 서리가 생겨 보온기능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덴마크에서 체포된 그가 입고 있던 얼굴 앞까지 길게 나온 모자는 상대적으로 덜 추운 지방에서 멋을 부리는 역할 이외엔 기대할 것이 없는 디자인이다.

정인철 사이언스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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