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이라 불리는 음반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놀라운 음반을 말합니다. 음반 자체에 그 시대에 정신을 담은 시대성도 필요하겠죠. 예컨대 비틀즈의 후기 앨범들이 대표적일 겁니다. 음반 단위로 음악을 소비하지 않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반의 가치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앨범 단위의 결과물이 주는 감동과 존중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하면 왠지 옛날 음악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음악과 사회를 담은 명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주저 없이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TPB)’를 뽑겠습니다.
TPB는 지난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논란에 대상이었습니다. 켄드릭 라마는 당시 최다인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습니다. 그중 5개 부분을 수상했죠. 하지만 그래미 최고의 상이라 할 수 있는 ‘올해의 앨범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 영광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돌아갔습니다.
물론 테일러 스위프트는 잘 세공된 좋은 팝 음반을 내놓았습니다만 켄드릭 라마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흑인음악, 특히 힙합에 대우가 좋지 않은 그래미에 한계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 사건이었다고나 할까요? 켄드릭 라마는 이를 비웃듯 그래미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그 외에도 TPB은 많은 자리에서 화제를 몰고 다녔습니다. 백인 경찰의 흑인 사살을 항의한 인권 시위 ‘Black Lives Matter’에서 는TPB의 수록곡이 ‘Alright’이 마치 주제곡처럼 쓰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TPB에 실려있는 곡인 ‘How Much A Dollar Cost’를 올해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곡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이 앨범은 엄청난 부담감을 이기고 만든 앨범이기도 합니다. 켄드릭 라마의 전작 ‘Good Kid, M.A.A.D City’는 역대 최고의 힙합 데뷔 앨범 중 하나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닥터 드레의 선택을 받아 ‘서부 힙합의 새로운 왕’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식어를 받았지요. 심지어 피쳐링으로 참여한 곡 ‘Control’에서 켄드릭 라마는 자신의 동년배 래퍼들을 거론하며 ‘너희들을 존중하지만, 너희를 랩으로 죽여 버리겠다. 대중이 니들의 랩을 기억 못 하도록 하겠다’고 도발했습니다. 랩이라는 음악 장르에 경쟁을 붙여, 더 나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도발이었지요. 그리고 TPB을 통해 켄드릭 라마는 자신의 도발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TPB를 명반으로 만드는 걸까요? 우선 이 앨범에는 당연히 훌륭한 음악이 담겨 있습니다. 켄드릭 라마는 전작 ‘Good Kid, M.A.A.D City’에서 최신 유행하는 음울한 전자음을 담아 트렌디한 음악을 선보였는데요. TPB는 반대입니다, 전통적인 흑인 음악이 담겨 있습니다. 프리 재즈부터 펑크, 가스펠, 알앤비까지 말이죠. 힙합이라기보다 전통적인 흑인음악에 가까운 반주를 얹어 랩을 합니다. 오히려 신선합니다.
물론 랩의 훌륭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곡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상황에 따라, 인물에 따라 켄드릭은 톤을 달리합니다. 치밀한 구성과 연기 덕분에 마치 1인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완벽에 가까운 운율과 테크닉, 플로우는 기본입니다. 랩의 가사 구성도 치밀합니다. 켄드릭 라마의 가사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전작 ‘Good Kid, M.A.A.D City’의 가사들이 이미 대학 영문학 교재로 쓰일 정도였지요.
TPB에서 켄드릭 라마는 한층 발전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흑인 사회에 다양한 면들을 다룹니다. 성공 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자괴감에 찬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These Walls, U 등) 성공한 흑인을 인정하기보다 이용해서 돈벌이에만 사용하려 하는 백인 사회를 비판합니다. (Wesley’s Theory, For Free? 등) 그리고 자긍심이 부족하고 모든 문제를 백인 탓으로 돌리는 흑인 사회 자신에 대한 냉정한 시선도 잃지 않습니다. (I, The Blacker The Berry 등) 마지막 곡에서는 죽은 힙합 영웅 투팍의 목소리를 소환합니다. 물론 기술의 힘을 빌어 만들어진 가짜 인터뷰입니다. 켄드릭 라마는 투팍에게 지혜를 구합니다. 마지막에 켄드릭은 투팍에게 자작시를 바치며 앨범을 마무리합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자작시도 앨범을 아우르는 장치입니다. TPB에서 켄드릭 라마는 곡이 끝날 때마다 시 구절을 읊습니다. 앨범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가 뱉는 시는 조금씩 더 길어집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비로소 켄드릭 라마는 자신의 시 전체를 낭송합니다. 이 시는 여지까지 곡들의 모든 부분을 담고 있고, 앨범의 제목인 ‘To Pimp A Butterfly’(나비를 착취하는 방법)이라는 주제의식을 담았습니다. 앨범 자체는 흑인 사회의 멸시부터 섹스, 폭력, 흑인 사회의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모든 주제가 마지막 자작시로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TPB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앨범은 아닙니다. 전작과는 달리 프로덕션은 흑인 음악의 유행과 반대로 갔습니다. 구성 또한 앨범 전체를 들어야만 이해가 되는 복잡한 구성입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은 심지어 가사 번역도 봐야 합니다(힙합 LE라는 사이트는 친절하게 이 앨범에 전 곡을 번역해 주셨습니다). 히트곡이 많지도 않습니다. 앨범의 끝자락에 가야 겨우 싱글 커트곡인 ‘i’를 들을 수 있지요. 심지어 앨범 길이도 79분에 달합니다. 오랜 기간 집중해서 들어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앨범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50위 안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면 이 앨범은 실패한 음반이겠지요.
하지만 이 음반에는 상업성을 넘는 고전이 될 가치가 있습니다.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흑인 음악의 정수를 담은 프로덕션. 흑인 사회의 고통과 고민을 다룬 메시지. 힙합 역사상 최고의 랩 퍼포먼스까지. 이 앨범은 명실상부 21세기 최고의 걸작 힙합 앨범입니다.
이 앨범이 담은 사상은 시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흑인 사회, 나아가 소수자들을 탄압하는 주류 사회. 자존감이 부족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소수자 공동체. 성공했지만 그 성공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과 주변을 상처 주는 개인까지. 소수자들을 모독하며 선거를 치른 트럼프가 대통령인 시대에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주제들입니다.
이 음악이 명반인 또 하나의 이유는 ‘힙합’이라는 예술 양식을 진보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올드하다고 느껴진 기존의 재즈, 블루스, 알앤비 등의 흑인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말이죠. 이미 발전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록 음악은 물론 힙합 음악조차 장르를 진보시키는 음악은 많지 않은 시대라 더욱 놀랍습니다.
이 앨범은 딱히 싱글컷을 할 만한 히트를 노린 곡이 많지는 않습니다. 대신 인상적인 순간은 차고 넘칩니다. 그 중 몇 곡을 추천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합니다.
I
‘I’는 선공개된, TPB의 타이틀곡입니다. 그나마 가장 부드러운 곡입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심상치 않습니다. 이 곡에서 켄드릭 라마는 흑인에게 무자비한 미국 사회를 고발합니다. 서로 증오하고 총을 쏘는 흑인 사회의 참상도 냉정하게 묘사하지요. 하지만 곡의 중심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부조리함과 싸우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겠다’(I love myself.)라는 긍정의 메시지입니다. 힙합 음악이 분노, 증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을 다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곡입니다.
How Much A Dollar Cost?
힙합 대통령 오바마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니 다루지 않을 수 없겠죠. 이 곡은 켄드릭 라마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간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노숙자 한 명이 켄드릭에게 1달러만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사기꾼이자, 마약 중독자로 보입니다. 켄드릭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만큼 만만치 않습니다. 켄드릭은 매몰차게 그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곡의 마지막에서 노숙자는 켄드릭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였고, 노숙자에게 주는 1달러의 진짜 값어치는 천국으로 가는 삯이었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기독교 국가들이 매몰차게 거절하는 현시대를 차갑게 파고드는 곡입니다.
Alright
그나마 ‘요즘 히트곡’에 가장 가까운 곡입니다. 전통적인 힙합 사운드와 재즈 애드립이 부딛치는 화려한 편곡이 인상적입니다. 마이더스의 손 패럴 윌리엄스가 작곡과 훅 보컬로 참여했습니다. 경찰의 흑인 사살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 뮤직비디오도 놀랍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라는 주제의식을 담았습니다. 이 곡은 흑인 인권 운동 ‘Black Lives Matter’에서 주제곡처럼 쓰였습니다. TPB이 다시금 ‘시대성’을 획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For Free? (Interlude)
이 곡은 켄드릭 라마와 켄드릭의 전 애인으로 추정되는 여성 간의 심한 말다툼을 다뤘습니다. 이 곡 시작에서 여성은 켄드릭의 성공을 시기 질투하며, 켄드릭보다 더 돈도 잘 벌고 친절한 다른 남자에게로 가겠다고 토해냅니다. 켄드릭은 이에 질세라 ‘내 고추는 공짜가 아니’라며 몰아붙입니다. 그의 랩을 들으면 비로소 여자는 한 개인이 아닌 성공한 흑인을 질투하고, 몰락시키려 하는 주변 사람들이고, 나아가 미국 사회 전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곡을 추천한 이유는 흔한 말다툼이 사회 문제로 바뀌는 반전의 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유려한 음악에 있습니다. 프리 재즈 선율 위에 여성의 ‘말싸움’ 연기와 켄드릭의 쉴 새 없이 쏘아붙이는 랩이 화려하게 얹혀 있습니다. 랩은 가사이기에 앞서 드럼, 리듬악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재즈 리듬악기 연주자로서 켄드릭 라마의 화려한 재능을 감상할 수 있는 곡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음악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담은 걸작 음반을 듣고 싶으시다면 TPB를 추천해 드립니다.
김은우 아이엠스쿨 콘텐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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