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우리가 비록 ‘새 해가 밝았다’라고 쓰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새해’라는 말에 ‘새 해’라는 뜻을 품는다. 새해를 맞아 동해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부모들은 말한다. “철수야, 저기 떠오르는 태양을 보아라.” 그 어떤 부모도 “영희야, 동쪽을 향해 기울고 있는 수평선을 보아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천동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그 주변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그걸 어떻게 알지? 봤는가?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태양계를 내려다보면서 행성의 움직임을 확인한 사람이 있는가 말이다.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지동설은 과학이고, 천동설은 비과학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천동설이 비과학적인 주장일까?
우리는 매일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본다. 밤하늘을 보면 별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이것은 북극과 남극을 이은 축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우리의 감각은 분명히 지구는 가만히 있고, 태양과 별이 하루에 한 바퀴 돈다는 것을 알려준다. 게다가 태양이 뜨고 지는 위치가 매일 조금씩 바뀌는데 다시 같은 위치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까지 딱 1년이 걸린다. 이것은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말해준다. 별과 태양의 운행을 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것 같다.
천동설을 주장한 옛 사람들은 아주 정직한 관찰자였다. 그들은 관찰에 따라 해와 달과 행성 그리고 하늘의 모든 별이 지구를 중심으로 완벽한 원운동을 하는 초기 우주 모형을 만들었다. 관찰에 따라 모형을 만들었으니 천동설은 과학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초기 모델에 어긋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행성들이 일시적으로 운행의 방향을 거꾸로 바꾸더니 다시 원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순행 후 역행하다가 다시 순행하는 일이 관찰되었다. 지구가 중심이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행성들은 항상 앞으로만 움직여야 한다.
고대의 과학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어이할꼬? 그들에게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기는 도는데, 작은 원을 그리면서 돈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전원이라고 한다. 주전원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공전 궤도 상에 중심을 둔 작은 원이다. 주전원을 그리면서 공전하면 역행하는 구간이 생기게 된다. 우주 초기 모형이 바뀌었다. 조금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구가 중심이다. 관찰을 통해 초기 모형을 만들고 초기 모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이 관찰되자 초기 모형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보완하고 수정한 것이다. 원래 과학은 이런 식으로 발전한다.
행성의 역행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결함이 잇달아 발견되었지만 큰 틀의 변화가 없는 작은 수정을 거듭하면서 천동설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등장했다. 1609년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았다. 그의 관찰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이어져 오던 천동설이라는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2000년 동안 굳건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때 과학은 획기적으로 변한다. 기존의 세계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 즉 지동설을 채택하였다. 과학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간 과정에는 관찰하고, 관찰에 따른 모형을 만들고, 모형에 어긋나는 새로운 관찰을 하면 모형을 수정하고, 수정 모델로 도저히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면 과감히 옛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는 과학의 발전 방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과정에는 과학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천동설은 과학이라고 봐야 한다. 그것도 아주 좋은 과학이다.
물론 천동설은 틀린 이야기다. 과학이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게 아니다. 과학이란 ‘의심을 통해서 잠정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이라고 해서 완전히 옳은 이론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수정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의 우주 모델도 언젠가는 부인되고 전혀 새로운 모델이 나타날 것이다. 이야기가 멈추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이제 천동설주의자는 없다. 여전히 우리 눈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지만, 뇌는 그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동설주의자들은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다만 이 천동설의 중심에는 지구가 아니라 자신이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천동설주의자들은 가족, 직장, 공동체, 그리고 나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 일정과 맞지 않으면 그 어떤 모임도 열리면 안 된다. 권력과 이익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갖든지 내가 나눠줘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 사람은 제거한다.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천동설주의자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잘못된 일의 중심에는 자기가 아니라 다른 행성이 있다고 여긴다. 세상의 허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행성의 것이다.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으니 해경을 해체해야 한다. 자신의 처지에 자괴감이 들고 괴롭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가 당했던 그 참담함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가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가물가물하다.
천동설주의자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만들어준 이미지에 속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好信不好學 其蔽也賊(호신불호학 기폐야적). 사람들이 믿기만을 좋아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지 않으면, 사회적인 폐단이 된다는 뜻이다.
천동설은 비록 틀렸지만 아주 좋은 과학이다. 하지만 천동설주의자는 사회의 폐단일 뿐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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