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다고 미용실 다녀왔는데 다들 트럼프 머리라고 하네요. 요즘 세계지도 보면 머리 아파요. 민주적으로 선출되었고 국익을 위해 일하고 높은 지지율 가진 정치인을 꼽아보니 아베밖에 없잖아요. 미국은 심지어 트럼프고.”
단단해 보이는 큰 체격에 시원시원한 목소리. 그러나 대화를 나눌수록 거칠게 포효하던 프로레슬러는 사라지고 말 잘하는 ‘육체파 지식노동자’ 김남훈(42)이 남는다. 스포츠 해설가, 프로레슬러, 라디오 DJ, 강연자, 칼럼니스트 등 직업만 20개가 넘는다.
‘정치인은 정치공세 하는 게 맞습니다. 육탄공세만 안 하시면 됩니다. 그건 저 같은 프로레슬러가 합니다’라는 그의 SNS 글은 시원하지만 따뜻하다. 사람들은 ‘뇌까지 잘생겼다’며 환호한다. 지난 12월 30일 도곡동의 한 카페에서 김남훈 씨를 만났다.
―요즘 일과가 어떤가.
“해설과 강의가 있을 땐 일 하고 운동도 꾸준히 한다. 최근엔 KBS 다큐멘터리 드라마 ‘한국사기’에서 구석기시대 원시인으로 출연했다. 지난번엔 사채업자, 내년 초 방영하는 드라마에서는 나이트클럽 조직폭력배로 나온다. 여러 일을 해 봤지만,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연기는 정말 힘든 거 같다. 배우들은 눈물 연기를 할 때 정작 연기는 1분 만에 끝나는데 감정에서 못 빠져나와 10분 넘게 울기도 한다.”
―‘청춘 매뉴얼 제작소’, ‘통하면 아프지 않다’ 등 그동안 저술한 책이나 강연을 보면 유독 청년과 청소년에 애정이 많은 거 같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10, 20대는 대충 살아도 밥 먹고는 살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교정시설이나 중고등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장래희망을 묻자 몇 명이 “정규직이요”라고 하더라. 원래 스펙이란 단어도 기계에 쓰는 말이다. 구글에 ‘car spec’이라 검색하면 기계의 성능에 대해 나오는데 ‘차 스펙’이라 치면 현대자동차 입사 스펙이 나온다.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세상은 더 힘들어지겠지만, 후배들에게 뭐라도 얘기해 주는 게 선배의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살아갈 수 있도록 근거 없는 낙관을 심어주고 싶다.“
―2000년에 첫 책을 출간한 후 14권 정도 책을 냈다. 장르도 어학, 기술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다양하다.
“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가장 좋은 방법이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 독서와 글쓰기는 그 자체가 재미있다. 어렸을 때 동네 서점에서 일주일에 두 세 권씩 책을 사 읽었다. 부모님께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들의 독서 활동을 존중했다기보다는 두 분 다 옷 장사로 바쁘셔서 그러셨던 거 같다. 그때 콘텐츠에 몰입하는 경험을 했던 거 같다. 그러다 천리안에서 ‘엽기 일본어’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다가 책까지 내게 되었다.”
―일본어를 잘하게 된 계기가 있나.
“모터사이클, 프로레슬링, 격투기처럼 엄마가 싫어하는 세 가지를 워낙 좋아한다. 일본어도 고등학교 때 일본 오토바이 잡지를 100권 넘게 본 게 계기가 됐다. 처음엔 그림만 봤는데 대학교에서 6개월 동안 일본어를 공부하고 다시 그 잡지를 펼치니 글이 읽혔다. 시간, 노력, 돈을 투자하면 결과가 나온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격투기에서 상대에게 큰 충격도 못 주는데 왼손으로 계속 잽을 날리는 이유는 사실 거리를 재기 위해서다. 그러다 적당한 거리를 찾으면 오른손으로 결정타를 날리는 거다. 일본어처럼 작은 성공의 경험들로부터 출판, 방송활동, 프로레슬러 데뷔의 힘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관심 분야가 많은데 프로레슬러의 길을 택한 계기가 있나.
“나 역시 자아는 폭풍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몸은 따라가지 않았던 청소년기가 있었다. 그때는 슈퍼맨, 스파이더맨처럼 절대적으로 큰 존재들에 매료되기 쉽다. 어느 날 AFKN 채널에서 아메리칸 프로 레슬러들이 어마어마한 근육질 몸을 뒤엉켜가며 경기하는 걸 봤다. 마치 성당에 걸려있는 아름답고 웅장한 벽화를 보듯 넋을 잃었다. 그때 프로레슬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근데 시골에서 별도리가 있나. 평범하게 중·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 졸업 후 취업까지 했다. 우연히 체육관에 다니게 되면서 데뷔전 기회를 잡게 되었다.”
김남훈은 평범하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이후에 프로레슬러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박정훈 기자
―프로레슬링의 매력은 뭔가.
“프로레슬러 김남훈은 자연인 김남훈이 만든 일종의 콘텐츠다. 사각의 링 안에서 사람들에게 그 콘텐츠를 피력하는 거다. 수백 관중이 열광하고 때로는 비난하는 즉각적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짜릿하다. 나는 프로레슬링도 격투기와 마찬가지로 리얼 승부라고 생각한다. 격투기 선수가 상대방과 싸우는 거라면 프로레슬러는 관객과 싸우는 거다. 상대 선수와 한 팀이 돼서 관객이 예상했던 그림을 뛰어넘고 허를 찌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선수가 만드는 ‘액션 오페라’가 프로레슬링이다. 그 재미가 내겐 참 크다.”―김일, 이왕표와 같은 프로레슬링 스타가 더는 탄생하고 있지 않다. 예전보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같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슬링은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쉽지 않을 거다.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외면받는 건 상품이 후지기 때문이다. 선수 풀도 굉장히 협소해졌다. 그렇다고 프로 스포츠를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말이 안 된다.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 같지만 어쨌거나 나는 계속할 생각이다. 재미있으니까.”
―현재는 스포츠 해설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경기를 하다 해설을 하니 어떤가.
“선수들이 다치는 걸 보는 게 참 힘들다. 김일 선생님이 시합장에 오시면 어떤 경기든 늘 주최 측에서 VIP석을 줬는데 선생님은 그 자리를 마다하고 언제나 뒷자리에 앉으셨다. 본인이 수없이 겪었기 때문에 맞는 게 너무 아파 보여서 마음이 안 좋으시다는 거다. 처음엔 이해 못 했는데 나이를 먹고 해설을 하다 보니 이해된다.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관객과 호흡이 안 맞아 반응이 별로일 때 내가 다 안타깝다.”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SNS를 참 열심히 한다.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라는 책까지 냈다.
“SNS는 작가, 스포츠해설가, 강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청중과 직거래할 수 있는 통로다. 소프트뱅크를 창업한 손정의 회장은 ‘트위터는 좌뇌와 우뇌 바깥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외뇌다’라고 했다. 집단지성이라는 얘기다. 나는 SNS가 집단지성인 동시에 남에게 하고 싶은 말을 혼잣말 하듯 할 수 있는 창구라고 생각한다. 독백을 가장한 방백이다.“
김남훈은 SNS를 통해 본인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후원금 모집을 돕기도 한다. 사진=김남훈 페이스북 캡처
―정치적인 글도 많이 썼다. 원래 정치에 관심이 많았나.
“원래는 그저 부조리에 분노하는 수준이었다. 몇 년 전 홍대를 지나가다 청소 노동자들이 해고 위기 상황에 처해 농성하는 걸 봤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까 그분들 식대가 10원으로 설정되어 있다더라. 너무 열 받아서 통닭을 10만 원어치 사서 농성장에 갔다. 그 후 반값등록금,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시위 등 여러 농성 현장을 쫓아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치가 밥 먹여준다’는 명제를 깨닫게 됐다. 표창원, 박주민 등 좋아하는 정치인을 따라다니며 응원을 한 것도 그런 이유다. 직업 정치인으로 나갈 생각은 별로 없지만 계속 관심을 두고 행동할 생각이다.”
―정치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얼마 전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최저임금 인상으로 관리비가 가구당 4000원이 오른다는 이유로 경비 노동자들을 해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다행히도 입주민들과 함께 그 사태를 막긴 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려면 임금상승으로 인한 해고 금지 내용을 관리규약에 넣어야 한다. 월 4000원 때문에 해고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지켜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일단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건 누가 뭐래도 시민들이다. 조심해야 할 점은 모든 정치인을 묶어 ‘그놈이 그놈이야’라며 깎아 내리는 정치혐오다. 정치는 시민사회보다 조금 늦게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마음대로 잘 안되고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 ‘모두 감방 보내야 한다’는 식은 옳지 않다. 비판과 정치혐오는 엄연히 다르다. 일부 개그 프로그램에서 특정 사안을 날카롭게 꼬집기보다 모든 국회의원을 멍텅구리로 표현하는 건 불만이다. 그건 비판도 풍자도 아닌 혐오다.”
―인생의 롤모델이 있다면.
“개그맨이었다가 영화감독이 된 기타노 다케시다. 그분처럼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최근 그분의 GV(관객과의 대화)에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도구적으로 일단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유명인이 되어 돈도 벌고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실제로 SNS를 통해 급하게 혈액이 필요한 사람이나 후원금이 부족한 정치인들에게 도움을 준 적도 있다. 영향력은 내게는 밥줄, 다른 사람에게는 위기 상황에서 구해줄 산소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박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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