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대표적인 ‘독과점 영역’이다. 실제로 장하성 교수가 한국의 불평등 실태에 관한 자료를 부지런히 정리하고 소개하는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은행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기업에 비해서도 연봉이 훨씬 더 세다.
독과점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경쟁촉진’이다. 그러나 은행업은 고객 돈으로 하기 때문에 건전성 문제가 중시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관료들도 은행의 진입장벽을 높게 잡고, 신규진입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은행의 독과점을 보호, 강화시켜 준 셈이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에 의해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 스마트폰, 모바일 분야에서 활발한 기술변화가 일어났다. 그 연장에서 핀테크와 P2P대출 등의 새로운 금융기법이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 겨우 ‘초기단계’로, 신기술 금융 덕택에 한국금융의 숙원과제였던 10%대 ‘중금리 시장’이 열리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은행업에 대한 기존의 독과점적 시장구조를 위협하고 있다. 댓글로 링크하는 다른 기사에 의하면, KB국민은행을 포함해서 은행업에서만 3600여 명 규모의 희망퇴직자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역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금융권 구조조정에서 가장 큰 규모인, 전 직원의 14%가 명예퇴직을 하는 KB국민은행의 경우 40대 여성들이 퇴직자의 최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보도를 참고하면 다른 은행들은 임금피크제 등과 맞물려 50대 직원들도 많다고 한다.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떻게 전개될까? 대략 추론해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① 핀테크-P2P와 같은 금융 분야의 기술혁신 ⇒ ②은행업·보험업 등 독과점적 지대추구 경제권의 위협 ⇒ ③ 은행업·보험업 등 매출액·영업이익 등 감소 ⇒ ④ 단계적인 대규모 희망퇴직과 대규모 정리해고 발생 ⇒ ⑤ 특별퇴직금과 위로금 등 3억~5억 원을 밑천으로 자영업 및 프랜차이즈에 진입 ⇒ ⑥ 자영업에서 50대 자영업의 비중은 더 커지고 + 자영업의 과당경쟁은 지금보다 더 심해짐 ⇒ ⑦ 소득이 낮은 자영업자의 비중 급증 ⇒ ⑧ 사회복지 혜택에서 배제된 자영업의 사회문제화 ⇒ ⑨ 60~70대 빈곤 노인의 확산 ⇒ ⑩ 인구구조의 변화(=고령화)로 인해 65세 노인이 되는 인구규모 자체가 많아짐 ⇒ ⑪ 1인가구의 확산과 맞물려, 고독 + 높은 노인 빈곤율 + 높은 노인 자살율 ⇒ ⑫ ‘죽지 않으려는’ 노인들은 70세가 넘어서도 소득이 별볼일 없는 노인 일자리에 매달림 ⇒ ⑬ 성장 잠재력과 사회적 활력은 더욱 떨어짐.
그럼 이런 문제를 잘~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물론 있다. 대안은 가능하다. 원인분석이 정확하면, 대안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대안의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 △기술혁신 △산업구조 고도화 △노동시장 △자영업 △어르신 빈곤 △어르신 일자리 문제가 ‘서로 얽혀있는’ 문제라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반드시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체계적인 분석과 그에 입각한 ‘체계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대안적 방향성의 핵심은 ‘굵고 + 짧게 일하는’ 노동시장을 ‘가늘고 + 길게’ 일하는 노동시장으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컨대, ‘연공서열식 급여체계’는 민주노조 운동이 투쟁을 통한 쟁취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투쟁의 성과물이 급여체계와 성과체계의 괴리도를 키워, 동료 노동자를 희망퇴직·정리해고하게 만드는 ‘구조적 압박’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수명연장·고령화를 감안하여, 가늘고+길게 일하는 노동시장으로 재편해야 한다. 아니면, 평균 수명은 80대 중반이 되어 가는데 50대 중반에 퇴직해서 30여년을 ‘실업자+빈곤+고독’과 싸워야 하는 이 구조를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셋째, 굵고+짧게 일하는 노동시장을 가늘고+길게 일하는 노동시장으로 재편하는 핵심적인 제도 축에, 노동시장의 재편+복지체계의 재편+어르신 대책의 재편이 하나의 패키지 정책으로, 동시에 추진되어야만 한다.
예컨대, ‘산업구조 고도화’의 다른 말이 ‘구조조정’이다.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그동안 ‘구조조정=산업구조 고도화’를 반대했다.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 반대’처럼 공허한 구호다. 독과점 영역에 있는 자신의 사업장만, 모든 이들이 강력한 경쟁압박에 시달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쟁 한복판에서도 섬처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그런 노동운동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접근이 아니라, 회피하고 시간을 지연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나. 먼저 고용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고용안전망은 어떻게 강화해야 하나. 소득이 괜찮은 일자리에 있는 노동자들이 고용보험료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내야 한다. 고용보험료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부담분이 서로 ‘매칭’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고용보험료가 올라가면, 사용자의 고용보험료도 올라간다. 그동안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노동자계급 전체를 위한 고용안전망 강화는 무관심하고, 독과점적 일자리 지키기에만 공을 들여왔다.
그리고 지금처럼 ‘나이가 먹을수록’ 비용이 많아지는, 그러나 성과와의 연계가 취약한 연공급 급여체계를 직무급 급여체계로 점진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0대 초중반이 될수록 퇴직 압박을 받게 되는 구조를 헤어나올 수 없다.
기술혁신은 기존의 독과점 영역 모두에 대해서 경쟁촉진의 압박을 가하며, 새로운 질서 변경을 요구하게 된다. 그동안 독과점 영역에서 독과점 자본과의 투쟁을 통해 독과점적 지대를 높은 연봉으로 나눠먹을 수 있었던 노동자들의 지위도 함께 위협받게 될 것이다.
쌍용자동차 투쟁 이후,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함께 살자”라는 구호를 썼다. 그런데, “함께 살자”라는 구호가 정책 수준에서 현실화되려면 △노동시장 △자영업 △어르신 문제를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포괄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 ‘굵고 짧게’ 일하는 노동시장을 ‘가늘고, 길게’ 일하는 노동시장으로 전면 재편하기 위한 종합적인 정책 패키지를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제 아무리 지금 당장 독과점적 일자리를 지키며 세상의 변화를 부정하려고 발버둥 쳐도 퇴직하는 그 순간, ‘헬조선’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구조적 압박의 실체와 불가피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로 그 지점부터 사회연대적 대안모색이 시작되어야 한다.
여당은 물론 야당의 대선후보들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박근혜-새누리당 비난’으로 그저 권력을 잡을 생각뿐이다. 실현가능한 좋은 정책은 당연히 ①실태분석 ⇒ ②원인분석 ⇒ ③대안적 방향성 ⇒ ④적절한 정책수단의 채택 순서를 밟아야 한다. 그런데 대선후보정도 되는 정치인이 ①~④를 모두 생략된 채, ‘야마’와 ‘자극적인 워딩’ 중심의, 현실과 동떨어진 하나마나한 내용을 정책-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노동운동이 주장하는 “함께 살자”는 구호는, 민주당이 주장하는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는 ‘자본’에게 요구하거나, 혹은 새누리당-박근혜을 비난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조는 민주노조대로, 야당과 민주당은 야당과 민주당대로, 스스로, 이론적-정책적 밑바탕이 준비되어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다. 그 길은, 여전히, 안드로메다만큼이나 아주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최병천 정책혁신가(전 국회의원 정책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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